그리스 팔랑크스
영화 『300』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역시 “스파르타”를 외치며 큰 방패와 갑옷을 착용한 그리스 중장보병들이 경갑옷으로 무장한 페르시아 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이다. 영화 『300』은 막강했던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가공할 전투력이 다소간의 영화적 과장을 포함하여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과 그들의 전매특허였던 팔랑크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실천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리스 중장보병
고대 그리스 전역은 마케도니아, 테베, 아테네, 스파르타 등의 폴리스(Polis) 라고 불리는 도시국가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개별 폴리스는 청동제 투구와 흉갑, 정강받이, 그리고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보병(Hoplite)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를 보유 하였다. 당시 기술수준의 한계로 말미암아 보병들의 이러한 무장은 대량생산을 하는 것이 불가능 했고 각 장비들 하나하나가 숙련된 장인들의 수작업을 통해 생산되었던 관계로 이러한 장비의 가격은 무척 고가이기 마련이었다. 소규모 도시국가에 불과 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든 보병을 무장시키기 위해서 어디서 재원을 마련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뜻밖에도 그리스 시대의 병사들은 개개인이 직접 돈을 내고 이러한 무장을 마련했다. 그들은 어떻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전투에 사비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직접 참가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흔히 그리스의 직접민주정이 민주주의 제도의 원형이라고 알고 있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리스의 민주정은 당시 시민으로 분류되는 계급의 직접 정치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이러한 시민은 현재의 시점으로 말하면 중산층 계급의 남자로 제한 되었다. 사비를 털어 자신의 무장을 장비하고 전투에 참여 할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인 남성만이 시민계급으로 인정이 되었고, 자신이 무장을 구입할 수 없는 노예나 극빈층 그리고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여자는 시민으로 인정 되지 않았다. 이렇게 그리스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지불하여 무장을 구입하고 고된 훈련을 마치고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 했던 이유는 시민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인정 받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2. 밀집보병대형의 대명사 방진대형, 팔랑크스
당시 그리스 중장보병들은 밀집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수행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팔랑크스(Phalanx)’라고 한다. 한국어로는 ‘밀집 장창대형’으로 번역된다. 각 보병들은 왼손에 약 15kg에 달하는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도리(dory)’ 라고 불리던 길이 약 3m 의 장창을 들고 전투를 치렀다. 마케도니아를 기준으로 보통 하나의 방진은 16 x 16의 대형을 이루었는데 앞 열은 대체로 나이가 어린 신병, 뒤 열은 전투 경험이 많은 고참급 병사들이 위치했다.
앞 열에 위치한 병사들이 전사하면 바로 뒷줄에 있던 병사가 앞으로 나와 전사한 병사의 자리를 메꿨다. 수 백 명의 중무장한 병사들이 전력을 다해 밀어대는 힘은 엄청난 것이어서 길어봐야 수 십 분 동안의 전투에서 한쪽 방진은 깨지기 마련이었고 일단 방진이 깨어질 경우 재집결은 불가능 했다. 일단 방진이 깨지면 보통 후방이나 양익(兩翼)에 위치했던 경보병들이나 용병이었던 이민족 기병들이 돌격하여 패주하는 적 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3. 팔랑크스의 위력과 한계
팔랑크스의 장점은 무엇보다 특유의 뛰어난 저지력에 있었다. 빈틈 없이 빽빽이 늘어선 장창의 대오는 방진을 갖추지 못한 적 보병은 물론 기병 심지어는 하늘로 날아오는 적의 화살과 돌팔매 같은 원거리 무기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방어책이 될 수 있었다. 당시 그리스를 둘러 싸고 있던 이민족들은 이러한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위력적인 팔랑크스 앞에 무력하기 마련이었고, 80만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했다고 알려진 중동 최강국 페르시아 제국 역시 소수정예의 그리스 팔랑크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 리쿠르고스의 생애 에서 팔랑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들이 클라리온의 리듬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감연히 전진하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동시에 공포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강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이다. 팔랑크스의 단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팔랑크스 대형은 기본적으로 그리스의 평야 지대에 적합한 전술 이었다. 열과 오를 맞춘 정방형의 방진은 산악지대나 수풀이 우거진 지역 또는 습지처럼 대규모 병력의 기동이 힘든 지역 또는 대형을 이루는 것 자체가 힘든 지형에서는 무용지물과 다름 없었다.
둘째, 측후면의 공격에 매우 취약 하였다.
중장보병의 도리는 평균 2.5 ~ 3m 에 달하였고, 필리포스 2세 치하의 마케도니아 시대로 가면 그 길이가 6m에 달할 정도로 그 길이가 길어졌다. 이러한 장창은 최소 3명 이상의 앞사람까지 도달할 정도였고 이로 인해 신속한 방향전환이 어려웠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 측면이나 후면에서 적에게 기습을 받았을 경우 방진을 구성하고 있는 병사들은 전멸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셋째, 경직적인 전술과 낮은 기동성
중세의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엘리트 병사들이었던 중장보병들은 기병이나 경보병들을 보조 전력으로 취급하였고 이들을 이용하여 입체적인 전술을 구사하기 보다는 단순히 보병 방진대형으로 적의 대형을 와해 시키는 것 자체를 전투의 기본으로 삼았다. 또 200명 이상의 중무장한 병사들이 밀집대형으로 기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관계로 아무리 빨라 봐야 구보 이상의 기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 했다.

4. 팔랑크스 시대의 종말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폴리스들만큼의 체계적인 무장이나 전술이 전무했던 이민족 군대를 상대로는 팔랑크스가 막대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었으나,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으면서 팔랑크스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전투 초 중반까지 마케도니아군의 위력적인 팔랑크스의 위세에 짓눌린 로마군은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였으나 암석지대를 기동하면서 틈이 벌어진 팔랑크스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고작 100여명이 전사한 데 비해 마케도니아군은 3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 또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그간 불패를 자랑했던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격파된 이유는 단순히 정면돌격으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했던 로마군의 능력 때문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 중장보병의 근간을 이루었던 시민계급의 몰락이 가장 큰 이유였다. 펠레폰네소스 전쟁 등 장기간 이어진 전쟁으로 시민 상당수가 전사하였을 뿐 아니라 빈부 격차로 인해 당시 소득의 원천이었던 토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시민계급의 중장보병 자리를 이민족 용병대 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는 병력의 질적 약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그리스 전역이 로마에게 복속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결과적으로 이 전투를 기점으로 팔랑크스의 시대가 저물게 되었다. 하지만 2천 년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리스 중장보병들과 팔랑크스는 후대에 까지 강한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고, 현재 미해군의 근접방공 시스템의 이름이 되었을 정도로 철벽수비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그리스 중장보병들과 그들의 팔랑크스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