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잡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4편

미사리 건더기 2024. 11. 2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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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3편 보러 가기 
2024.11.25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3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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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바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의 패배는 스탈린이 유능한 장교들을 숙청했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약 350만이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합니다. 그리고 개전 후 불과 6개월여 만에 모스크바로부터 최대 서쪽 30km 지점까지 진격하는 대전과를 달성합니다. 누가 봐도 독일군에 의한 모스크바의 함락은 분명해 보였으며, 실제로 함락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소련은 각종 비밀서류를 소각하고 대피준비를 할 정도였습니다. 

독일군
1941년 겨울. 모스크바 인근에서 작전중인 독일군


수백만의 병력과 수천대의 기갑차량 및 항공기를 보유한 군사 대국이었던 소련이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무너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독일군의 전격전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독일이 보유한 우수한 기갑전력들 때문이었을까요?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둘 다 정답은 아닙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총서기장에 취임한 흐루시쵸프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스탈린이 있어서 전쟁에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이겼다." 그만큼 전쟁당시 히틀러에 버금가는 군사적 무능아가 스탈린이었습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나마 스탈린은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군사작전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이고 히틀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는 군사적 천재였으나 독일민족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을 하지 못했다는 착각 속에서 죽었다는 점입니다. 
 

 

스탈린의 삽질 

 

무능한 백정이었던 스탈린

 

그럼 스탈린은 무슨짓을 했던 걸까요? 또 그 강력한 소련군은 왜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초반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던 것일까요? 가장 흔히 알려진 설은 스탈린이 본인의 권력 공고화를 위해서 고위장교부터 시작해서 하급장교까지 무자비하게 숙청한 까닭에 수준미달의 장교들이 지휘했기 때문이다라는 설입니다. 유능한 장교들이 모두 숙청됐기에 초반에 독일군에게 그렇게 쉽게 무너졌다는 얘기죠.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설입니다. 실제로 숙청당한 장교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 가설에는 한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만일 유능한 장교단이 모두 숙청되고 남아있는 장교들이 전부 무능한 예스맨들 뿐이었다면, 그 무능한 스탈린과 장교단이 어떻게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을 저지한 것도 모자라 결국 베를린을 함락시켰을까요? 단순히 운이 좋아서였을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게오르기 쥬코프, 바실리 추이코프, 알렉산드르로딤체프 등 독소전 당시 굵직굵직한 전투에서 소련군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장군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실제로 스탈린 집권 초중반 숙청당했던 장교들 중 80% 이상이 독소전 이전에 군문으로 다시 복귀했다는 자료도 있는 만큼 이 설은 팩트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소련군
소련이 낳은 최고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유명한 전쟁사를 들여다 보면 만일 아군과 적군의 전력이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적군의 전력이 더 강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승전을 거둔 경우는, 아군이 유능한 만큼이나 적군이 무능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독소전이 바로 이 명제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당시 소련에게도 뭔가 패전의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스탈린 잘못은 맞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스탈린의 전매특허인 그놈의 의심병 때문이었습니다. 스탈린은 '그루지아의 백정' 이라고 불렸을 만큼 집권당시 많은 사람들을 숙청했고 그만큼 많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비밀경찰(체카)을 이용해 군의 동향을 감시하고 장교들을 숙청할 빌미를 찾곤 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결국 역대급 삽질을 하게 되는데 바로 정치장교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 정치장교는 집단군단위에서부터 말단 소대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군의 동향을 감시했고, 말만 장교였지 공산주의(정확히는 스탈린주의) 이론에만 빠삭한 반면 군사분야에 대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문외한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게 비극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들의 권한은 막강하였고, 정치장교의 발언에 토를 다는 것은 사상무장이 덜 됐다는 증거로 치부되었습니다. 정치장교들은 전략적 또는 전술적 후퇴와 패주를 구분하지 못했고, 아군에게 유리한 공세시기를 기다리는 행위와 겁에질려 공격을 망설이는 행위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전투가 발생하면 방어전의 경우 전멸할 때까지 자리를 사수해야 했고, 상부에서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이 자명한 상황에서도 돌격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이들의 명령은 제대 지휘관의 명령에 앞섰고 만일 항명을 할경우 즉결처분 또는 굴라그행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게 말단 병사들 뿐만이 아닌 제대 지휘관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조차 각 제대에 배치된 정치장교의 주관적 판단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급 제대 지휘관이 능동적인 지휘를 할 수 없음은 자명했습니다. 

(여담으로 소련의 경직되고 비합리적인 체제를 고발한 소설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보면, 전쟁 당시 어뢰정의 지휘관이었던 인물이 종전 후에 친하게 지냈던 영국 장교에게 기념품을 받고 이덕분에 스파이 혐의로 굴라그에 수감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승리하면 조국의 영웅, 패배하면 조국의 반역자가 되는 이런 이분법적 행정처분이 당연시 되던 상황에서 각급 제대 지휘관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향해 반격을 해야 할지 후퇴를 해야 할지 아니면 위치를 사수해야 하는지 도저히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개전직후 소련군이 지리멸렬하게 패배한 이유는 각 제대 지휘관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스탈린이 멍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을 통해 적의 방어선에 강력한 충격력을 투사하여 적의 방어선을 붕괴 시킨다는 현대적인 기동 전 교리는 소련의 천재적인 군사전략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고안해 냈으나 이러한 천재마저 스탈린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1937년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비운의 천재 전략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결론

 

이러한 상황에서 각 제대 지휘관들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탈린 자신이 오판했음을 깨닫고 정치장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각급 제대 지휘관들에게 작전 재량권을 부여한 이후에 소련군이 독일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1941년 겨울 이전 소련이  패배할 것이라며 방한장비 조차 지급하지 않을 정도로 이렇다 할 동계전투를 준비하지 않은 점. 무솔리니를 돕기 위해 북아프리카 까지 전선을 확장한 점. 춘계공세 때 모스크바 점령 대신 카프카스 지역 공략을 우선 순위로 둔 점 등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으로 인한 독일군의 전력분산이 패배의 단초를 제공한 것 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당시 소련의 지휘관들이 무능해서 연전연패 했다는 설은 앞서 말한 대로 그야말로 낭설에 불과하며, 당시 소련군 지휘관들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고 결국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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