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수부대라는게 있는데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 내린다는 거야 왠지 멋있어 보여서 지원했어 』(미드 밴드오브브라더스 中)
위 대사는 2001년 출시되어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미드 밴드오브브라더스의 대사 중 일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 전개 되어 굵직굵직한 전투를 수행한 미국 제101공수사단을 배경으로 한 논픽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였는데 총 10부작인 이 드라마는 매화 첫 장면에서 당시 실제 101공수사단 예비역들을 출연시켜 인터뷰를 하는 형식을 도입해 신선한 감동을 선사한바 있다.
이번화에서는 제2차 대전 당시 유럽의 창공을 누비며 전사(戰史)에 영원히 기록될만한 업적을 쌓은 미국 제101공수사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1. 하늘에서 떨어지는 죽음의 사신 공수부대
101공수사단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공수부대란 어떤 부대인지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다들 알다시피 공수부대란 항공기를 이용해 고공에서 낙하하여 기습적으로 적의 의표를 찌르는 부대를 말한다.
한국의 경우 공수부대 = 특전사 = 특수부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틀린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일한 공수부대가 특전사(특수전사령부) 소속이며 실제로도 특수전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특수부대로 칭할 뿐이다. (특전사의 영문명도 KSF, Korea Special Force)
따라서 국가마다 상이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수부대를 정예부대로 취급하기는 해도 부대의 임무나 규모 등은 일반적으로는 보병과 같은 정규부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공수부대는 왜 정예부대로 취급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포위되기가 쉽다. 공수부대의 특성상 작전 투입지역은 전선(戰線)이 아닌 적진 깊은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보병부대의 경우 적에게 포위됐다는 사실 자체로 집단적 패닉에 빠지기가 쉬운데 공수부대는 전선일대가 아닌 적의 후방 깊은 곳에 낙하하여 임무를 수행한다. 투입될 때부터 적에게 포위될 것을 예상하고 투입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아군이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거나 돌파하더라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경우 투입된 부대원들은 전멸할 수 밖에 없다.일례로 일반 보병사단 같은 경우 사령부는 전선 수킬로~수십킬로 후방에 위치하여 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수부대의 경우 전후방 구분이 없기 때문에 투입되자마자 사단장 및 사령부 참모진들도 소총을 들고 전투에 합세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할 정도이다.
둘째, 중화기를 소지하지 못한다.
낙하산으로 공중에서 투입되는 공수부대의 특성상 야포나 전차 등의 중화기 화력지원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적의 기갑부대에 노출이 될 경우 일방적인 학살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공수부대용 경전차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수송기의 탑재능력을 고려 할 때 현실적으로 제대로 된 전차를 공수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며 실제로도 과거 일부 도입되었던 공수전차들은 현재 전량 퇴역한 상태이다따라서 공수부대의 화력은 분대 지원화기, 박격포 정도 수준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셋째,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제2차 대전 당시 주요국들의 공수부대는 보통 자기몸무게 만큼의 장비를 몸에 착용하고 대공화기가 빗발치는 적진 상공 수천 피트에서 낙하산 하나에 의지에 몸을 날렸다.
이들은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분의 탄약과 식량을 갖고 투입이 되었다.이는 작전 투입 후 사실상 재보급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공수부대원들은 아군 주력부대와 랑데부가 실패할 경우 임무지로부터 전선 후방까지 수십~수백 킬로미터를 자력으로 돌파하여 귀대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공수부대원들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 우수한 전투기술, 생존기술 등을 요구 받았다.
공수부대는 위와 같은 악조건 하에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그 나라의 엘리트 부대로 취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공수부대의 기원
이론상 공수부대의 운용에 처음 관심을 보였던 곳은 미국이었고 이어 이탈리아가 최초로 공수훈련을 실시하기는 했으나 중대급의 소규모 공수훈련으로써의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공수부대를 최초로 전력화 한곳은 소련이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공수부대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소련은 1935년 낙하산과 글라이더를 이용해 군단급 공수훈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장차전에 있어서 공수부대의 전략적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가장 먼저 공수부대를 실전에 투입한 나라는 바로 독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수부대는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 예거, Fallschirm - Jaeger) 이다. 이는 세계최초로 공수부대를 전력화 하여 실제 전투에 투입한 것이 독일 공수부대이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기갑부대가 주력이 된 독일군의 주공은 벨기에와 프랑스를 연한 아르덴 고원지대를 돌파하여 프랑스를 침공 하였는데 이때 벨기에는 프랑스의 마지노선(Maginot line)에 필적할 만한 난공불락의 요새 에반에말(Eben emael) 요새를 보유 하고 있었다. 요새 전면에 일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을 투입할 경우 상당한 희생이 불가피한 상태였는데 이때 독일군은 공수부대를 전격적으로 투입하여 단 24시간 만에 에반에말 요새를 점령 하였다.
이때 독일 공수부대의 전사상자는 불과 30여명으로 전광석화와 같은 독일 공수부대의 활약에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독일은 1943년 크레타 공수 작전에서 독일군이 보유한 공수부대원의 2/3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으면서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기피하게 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독일 공수부대의 위용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반면 독일의 팔쉬름예거, 영국의 레드데빌스 등 유럽 공수부대들의 활약을 눈 여겨 보던 미국은 1942년 기존 제82, 제101 보병사단을 공수사단으로 재편하면서 본격적인 공수부대의 육성에 나서게 된다.
3. 어둠속의 강하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독-소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공방에서 독일군을 격멸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바꿔 쥐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수백만의 병력을 잃은 소련군은 연합국에 유럽전역에 ‘제 2전선’ 을 열어줄 것을 줄기차게 요청 했다
결국 본격적인 유럽침공에 앞서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하여,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여세를 몰아 남쪽에서부터 독일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합국의 이탈리아 침공작전이 개시된다.
이때 2년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며 준비하던 제82공수 사단도 이탈리아전선에 전개 되었는데 이탈리아 전선은 당시 독일공군 사령관이었던 케셀링 원수가 지휘하는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에 지지부진한 전투를 계속 했다. 그러던 사이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전사(戰史)에 영원히 기억될 지상최대의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방면에 배치되었던 제82공수사단과 본토에 주둔 중이었던 제101공수사단이 이 작전에 같이 투입되면서 공수부대란 어떤 존재인지를 화끈하게 보여 주게 된다.
제101공수사단은 연합군 본대의 상륙에 앞서 6월6일 새벽에 노르망디 지역 전역에 투입되어 주요 도로 철도 통신시설 등을 장악, 파괴하고 독일군의 포대를 파괴하여 노르망디 해안의 유타 섹터에 상륙 예정인 미국 제4보병사단을 지원할 것을 지시 받는다. 하지만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 일뿐. 6월5일 저녁 7,000여명 가량의 101공수사단 부대원들을 실은 1,400 여대의 C-47 수송기가 영국 전역의 비행장에서 노르망디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 풍경은 너무도 당당한 것이었지만 대규모 수송기 편대를 발견한 독일군 대공포대가 불을 뿜기 시작하면서 노르망디 해안의 밤하늘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공수작전 당일 노르망디 지역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면서 수송기 승무원들은 위치를 헷갈려 하기 시작했고 지상에서 쉴새 없이 뿜어대는 빗발치는 대공포화를 피해 지그재그로 비행하면서 수송기 내부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대공포화에 피격되면서 잇따라 불꽃으로 변해 굉음을 울리며 곤두박질 치는 아군 수송기들을 보면서 수송기 승무원들은 패닉상태에 빠져든다.
그러던 와중 선두에서 비행하던 수송기 한대가 피격을 우려한 나머지 강하 예상 지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병력들을 강하시키자 후속하던 수송기들도 잇달아 병력들을 강하 시켰다. 공수부대원들은 어지럽게 밤하늘을 수놓는 대공포화의 줄기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굉음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고 수송기 내부에 강하등이 켜지자 영문도 모른채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 난장판의 한가운데서 여러 명의 중대장 및 대대장들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 되면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일반적인 경우 이지경이 되면 부대가 와해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공수부대원들은 혼돈의 한가운데서도 피아식별을 통해 적게는 3~4명 많게는 수십명씩 짝을 이루어 소규모 전투부대를 즉석에서 조직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대대와 연대가 섞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제82공수사단 병력들과 제101공수사단 병력이 서로 뒤엉켜 혼성 전투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 소규모 전투부대들은 지휘계통이 사라진 와중에 스스로 임무를 찾아 독일군 대공포대를 파괴하고 이동중인 독일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장성들을 사살하는가 하면 주요 극비문서를 탈취 하는등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렇게 넓은 지역에 공수부대원들이 골고루(?)분산되어버리자 패닉에 빠져 버린 건 독일군 이었다. 한 밤중에 여기저기서 소총소리가 들리고 수류탄 폭음이 들려오자 당황한 독일군은 수십만의 공수부대가 출현 했다고 착각하고 우왕좌왕 댔다.
결과적으로 이들 공수부대원들의 활약은 매우 주효해서 독일군의 초기 반격작전을 저지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날 밤까지 최초 투입된 7,000 명의 공수부대원 중 1,600여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 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4. 영국, 미국 공수부대의 무덤, 마켓가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카랭탕 점령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101공수사단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할 최대규모의 공수작전에 투입된다. 훗날 연합국 최대실수 중 하나로 기록될 마켓가든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1944년 8월.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주력부대가 팔레즈 골짜기에서 괴멸된 후 연합국 수뇌부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종식 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독일군은 매일 30km가 넘는 땅을 연합국에게 잃고 있었으며 서부전선에 배치된 수비 병력도 2선급 부대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국 수뇌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연합국이 보유한 대규모 공수부대를 한꺼번에 투입해 한번에 독일까지의 진격로를 확보 하고자 하였다. 작전의 개요는 이랬다.
영국 제1공수사단 (Red Devils)과 미국 제82공수사단(All Americans), 제101 공수사단(Screaming Eagles)을 투입하여 네덜란드 아른헴, 네마겐, 아인트호벤 지역에 놓인 7개의 철교를 확보하고 독일군에게 혼란을 주는 사이 기갑부대가 주축인 제30군단이 69번 고속도로를 돌파하여 3개 공수사단이 확보한 철교를 지나 곧장 독일내륙으로 진격한다.
이 작전에서 대규모 공수부대의 집중투입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영국군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였는데 사막의 여우로 불리던 독일군의 명장 롬멜 장군을 북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에서 격파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었다. 얼핏 보면 그럴 듯 해 보이는 이 시도가 성공할 경우 연합군은 1944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 이라며 낙관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성공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방어중인 독일군이 전원 보병 부대로, 동시에 노약자 등으로 구성된 2선급 부대일 것
둘째, 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들이 ‘모두’ 제 시간에 임무를 완수할 것
셋째,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한 뒤 독일군이 반격을 하기 전에 30군단이 전선을 돌파하고 3개 지역의 교량을 모두 접수 할 것.
그러나 작전 실행일이 다가올수록 현지 레지스탕스 및 첩보요원들은 불길한 소식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작전지역 전역에서 독일군이 증강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더욱 불길하게도 독일 무장친위기갑사단 소속 전차들이 곳곳에서 목격 되었다는 것 이었다.
독일군이 연합국의 작전을 간파했다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른 부대들이 재정비를 목적으로 서부전선으로 재배치 되었던 것이었지만 그 타이밍이 실로 절묘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연합국 사령부는 이러한 불길한 첩보를 애써 무시하고 작전을 강행한다.
1944년 9월 17일 낮에 3만에 이르는 연합국 공수부대원들이 작전지역 상공에서 강하를 시작하였 다. 강하 초반에는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 되어 제101 공수사단은 아인트호벤의 다리를 점거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네마겐을 맡은 제82공수사단과 아른헴을 맡은 영국 제1공수사단은 사정이 영 여의치 않았다. 제82공수사단은 이내 독일군의 반격을 받고 교착상태에 돌입하였으며 영국 제1공수사단의 사정은 더욱 여의치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켓가든 작전은 완전한 실패 였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실패 요인, 방어전의 귀재라고 불리던 발터 모델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제9, 10무장친위기갑사단 소속 전차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국 제1공수사단이 점거하기로 되어 있던 아른헴 지역은 이내 독일군의 전차들로 둘러 싸여 버렸고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변해 갔다. 변변한 중화기를 보유 하지 못한 공수부대원들은 독일 전차들의 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많게는 수십 명씩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두 번째 실패 요인, 공수부대들과 랑데부 하기로 되어 있었던 제30군단의 사정 역시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기도를 완전히 파악한 독일군은 69번 고속도로인근에서 완강히 저항하였고 제30군단의 필사적인 공격도 계속 좌절되고 있었다. 랑데부 시간을 한참 지나서도 나타나기로 한 제30군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예정시간보다 36시간이나 늦게 네마겐에 도착 하였다.
세 번째 실패 요인, 제30군단은 결국 아른헴 대교 인근에서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에 도달하였고 미국 제82, 제101공수사단은 어렵게 확보한 다리를 뒤로 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른헴 대교의 영국 제1공수사단은 퇴로를 뚫지 못하고 있었고 이들을 구하러 투입된 망명 폴란드 제1공수여단도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였다.
작전개시 4일 째, 원래의 예상 작전 종료일로부터 하루 뒤인 9월21일. ‘우리가 보유한 마지막 탄약이 떨어졌다.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라는 무전을 끝으로 영국 제1공수사단과 폴란드 제1공수여단은 문자 그대로 전멸하였고, 제82, 제101 공수사단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작전개시 4일만에 투입병력 3만 5천중 1만 8천여명이 전사, 행방불명, 포로 잡히면서 연합국은 공식적으로 마켓가든 작전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최대 실패로 기록되는 마켓가든 작전은 ‘실 하나로 구슬 7개를 단번에 꿰어야 하지만 조금만 늦거나 한 개만 실패해도 완전히 실패하는 작전’으로 평가될 만큼 무모한 작전 이었다. 제101공수사단은 지리상의 이점과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맡은 바 임무를 완수 하였지만 결국은 몽고메리의 아집과 과욕의 실패작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에 참가하여 큰 피해를 입는 불운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5. NUTS!
마켓가든 작전 종료 이후 제101 공수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프랑스 인근의 지역에 배치되어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 일컬어 지던 이른바 발지전투가 개시되면서 아이러니 하게 최전방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게 된다.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가용병력을 총 동원하여 서부전선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이기로 하고 독일본토 및 동부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싹싹 긁어 모아 서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독일 제9, 10 기갑사단이 주축이 된 이 대공세에서 별다른 경계 없이 대치상대를 하고 있던 미군부대는 줄줄이 분쇄되었고 연합국의 수뇌부는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교통 요충지인 바스토뉴에 제101공수사단을 투입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낼 것을 지시했다.
1944년 12월 21일. 바스토뉴를 완전 포위한 독일군은 당시 제101공수사단장이었던 맥컬리프 준장에게 ‘귀 관의 부대는 완전히 포위 되었으니 명예롭게 항복하라’ 는 전문을 보냈다. 맥컬리프 준장은 이러한 독일군의 요구를 받고 N U T S (엿 이나 먹어라) 라는 짧고 굵은 답신을 보내 101공수사단이 결코 호락호락한 부대가 아님을 과시 했다. 여담이지만 사단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알파벳 아래 밑줄까지 그어 정성스레(?) 답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분노한 독일군 지휘관은 101공수사단을 괴멸시키기 위해 며칠 동안 박격포와 야포 공격을 퍼부으며 공격을 지속했지만 101공수 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국 바스토뉴를 사수. 한숨 돌린 연합군이 바스토뉴를 거점으로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숨통을 틔어주었다. 101공수사단의 분전으로 끝내 독일군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고, 흐렸던 날씨가 개자마자 압도적인 우위에 연합군 공군의 맹폭이 독일군의 머리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을 네덜란드 방면으로 몰아붙이고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겠다는 야무진(?)꿈을 접어야만 했고, 모든 것을 걸었던 도박에서 패하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바스토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미국 제 101공수사단이 있었다.
6.공수사단에서 공중강습사단으로의 변화
발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101공수사단은 이후 후방으로 돌려져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태평양 전역으로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101공수사단은 2차대전 기간 중 서부전선의 가장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어 총 1,766명이 전사하였으며 6,388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용맹한 활약을 펼쳤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은 대대적인 감군을 실시하였는데 101공수사단 역시 1045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창설 되었다. 이후 미국이 개입한 각종 국제 분쟁지역에 투입되며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베트남 전에서 이들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인 「햄버거 힐」 (Hamburger Hill, 1987)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베트남전 이후 101공수사단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공중강습사단으로의 개편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언급한 대로 공수부대는 전술, 전략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투입되는 부대로 작전지역의 특성상 막대한 희생이 강요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대규모 병력의 투입과 이에 따른 회전(會戰)이 특징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소수 정예부대의 핀 포인트 (Pin-point) 타격 위주로 바뀌어 가면서 과거처럼 대규모 공수작전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은 기존방식의 공수부대 대신 기동타격이 가능한 공중강습부대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헬리본 (Heliborne) 혹은 공중강습 (Air-assualt) 라고도 불리는 이 방식은 낙하산 대신에 헬리콥터라는 장비를 이용해 적진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중무장한 건-쉽(gun-ship)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수송헬기들에 병력을 탑승시키고 임무지역에 투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파치 헬기등 강력한 공격헬기의 압도적인 엄호사격 하에 완편된 상태로 적진에 투입되어 실시간으로 작전에 투입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 작전 등의 실전을 겪으며 이러한 부대편제 방식이 주효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앞서 서술한대로 장차전(將次戰)역시 국가간 대규모 전면전 보다는 소수 정예부대들 간의 국지전의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반 보병부대들의 숫자 보다는 소수 정예화된 전략기동부대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기동화된 부대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공중강습사단으로 다시 태어난 101사단 역시 미 육군의 주요 기동부대로써 그 소임을 다해나갈 것이다.
-본 게시물은 과거 필자가 매일경제에 기고했던 칼럼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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