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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설

전차의 역사 2편

by 미사리 건더기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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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갑부대의 신화, 독일의 전격전 (Blitz-Krieg)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 축구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면 나라마다 붙는 고유의 별명이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아트사커’, 네덜란드는 ‘오렌지 군단’, 스페인은 ‘무적함대’ 등이다. 그렇다면 독일팀은? 잘 알다시피 독일축구팀이 가진 별명은 ‘전차군단’ 이다. 이는 독일의 강력한 전차부대를 연상시키는 플레이에서 기인한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전차부대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유독 독일 전차부대가 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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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말기. 사열중인 독일국방군 쾨니히스티거 중전차 대대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패전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동서(東西) 양쪽 전선에서 전투를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전쟁이 다시 발발 한다면 신속하게 한쪽의 전선을 제압한 뒤 다른 전선에 전력을 집중 해야 함을 절감했다. 하지만 기존 보병이 위주가 된 전투방식으로는 한 쪽 전선에서의 신속한 제압과 다른 쪽 전선으로의 기동이 어려움을 과거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경험했고, 독일 지휘부는 그 해결책을 바로 전차에서 찾았다.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기갑부대 육성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히틀러에게 강조하였고 기갑부대가 지니는 효용과 선전성을 파악한 히틀러의 지지 속에 독일 기갑부대의 육성이 시작되었다.

전차를 처음 실전에 투입한 것은 영국이었고, FT17 이라는 근대적 전차를 처음으로 개발한 것은 프랑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갑부대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독일이었던 것이다.

1939년 9월 30일. 독-폴란드 국경을 수비하던 폴란드 병사들은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쟁방식에 얼이 빠졌다. 난데 없이 하늘에서 독일공군의 급강하폭격기가 굉음을 내지르며 대공포, 야포 진지에 포탄을 정확히 투하하고 그와 동시에 참호 앞에서는 짙은 회색 차체에 큼지막한 철십자가를 칠한 독일 전차들이 포를 쏘면서 내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전차들은 일단 진지를 돌파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 후방에 위치한 사단 사령부, 보급부대 등을 격파하며 끝없이 전진을 계속 했다. 결국 얼이 빠진 폴란드 병사들은 삼삼오오 백기를 들고 투항하며 독일군의 신출귀몰한 전술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이날 폴란드 병사들이 경험한 충격과 공포(?)의 전술은 훗날 호사가들에 의해 전격전(Blitz-krieg)으로 불리게 되는 최초의 현대적 공지합동전술의 효시가 되었다.

‘전격전’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신속하게 적을 공격해서 적의 저항의지를 분쇄하는 전술로써 사실 전격전이라는 말 자체는 독일군이 만들어낸 개념은 아니었고 연합국 측에서 처음 사용한 신조어였다. 따라서 독일군은 단 한번도 전격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군의 전투 수행방식 그리고 그 효과를 가장 잘 묘사한 단어로써 아직까지 그 단어가 통용되고 있다. (전격전이라는 개념이 실존 했냐 아니냐의 논쟁은 지속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이러한 유기적인 기동전을 최초로 수행했던 것이 독일군이었고 큰 성과를 거뒀다는 점이다.)
 

2. 전격전의 수행 방식

전격전의 수행 방식 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적의 제공권을 장악 한 뒤

둘째, 전선에 대한 야포 일제 포격과 동시에 급강하폭격기를 동원하여 적의 방공망, 주요 방어거점, 보급소등을 타격하여 적의 지휘계통을 혼란 시키며

셋째, 약화된 적의 방어선 중 가장 약화된 몇 개 지점을 선정하여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쐐기를 박은 후

넷째, 쐐기가 박힌 적의 방어선이 뚫리면 기갑부대는 그대로 적의 종심을 향해 진격하며 나머지 방어선에 배치된 수비병력의 소탕은 후속하는 보병부대가 처리하도록 한다.

기존의 선형 방어에 익숙했던 연합국들은 이러한 기동전술을 처음 접하면서 집단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특히 방어선을 돌파한 기갑부대가 후방을 향해 곧장 진격을 개시하면 전차라는 쐐기가 박힌 채 지휘계통이 무너져 버린 단위부대들은 저항의지를 상실하고 이내 항복해버렸다.

독일 기갑부대
폴란드 침공 당시의 독일 기갑부대 소속 1호 경전차

3. 독일 기갑부대의 장점

 위와 같은 독일기갑부대의 눈부신 활약상을 보면 대부분 독일전차의 성능이 엄청 우월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진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대전 중후반기에 가서 등장하는 티거(Tiger)전차나 판터(Panther) 전차는 연합국들의 대중적인 전차들보다 성능이 우월하긴 했지만 결코 그 수량이 많지 않았으며 독일군이 제일 많이 사용한 주력 4호 전차(Pz.kpfw.4)의 경우 미군의 주력 셔먼전차나 소련군의 주력 T-34전차 들과 성능이 같거나 오히려 떨어졌다. 또한 앞서 언급한 폴란드 전투나 프랑스 전투의 경우 독일 기갑사단의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던 전차는 1호 전차 (Pz.kpfw.1) 와 2호 전차 (Pz.kpfw.2) 였는데 이 전차들의 주무장은 각각 7.92mm 기관총, 20mm 기관포였다. 이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전차라고 부르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무장이었다.(전차의 분류 보기)반면 당시 영국, 프랑스는 마틸다 전차, B1 전차처럼 제대로 된 주포와 중장갑으로 무장한 어엿한 전차들을 대량 보유 하고 있었다.

마틸다 전차
영국군의 보병전차 마틸다2. 프랑스 침공 다시 독일군의 일반적인 대전차 화기로는 도저히 장갑을 뚫을 수 없어서 독일군은 88mm 대공포를 동원해서 이 전차를 격파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 기갑부대는 자신만의 강점을 갖고 있었다. 연합국의 전차들은 주로 두 세 대씩 보병부대에 분산 배치되어 보병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임무가 국한 되었을 뿐 아니라 전차들간의 통신시설이 전무 하였다. 따라서 전차병들은 작전 시작 전에 브리핑을 듣고 나서 일단 전차에 탑승한 후부터는 전장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심지어 자칫 잘못해서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고립되어 각개격파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기갑사단을 편제 하여 전차와 장갑차등으로만 구성된 기계화 부대를 집중 운용하여 기동력과 그에 따른 충격력을 극대화 하였다. 또한 전차마다 무전기를 탑재하여 실시간으로 급변하는 전장환경에 대한 실시간 파악은 물론 전차간, 인접부대간 유기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입체적인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4. 전차의 한계와 초중전차(超重戰車)의 등장 

전차의 등장이 전장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긴 했지만 전차가 만능의 병기는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전차병들은 외부로 통하는 모든 해치를 닫고 완전 밀폐된 전차 안에서 전투를 수행한다. 따라서 관측시계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울창한 숲이나 복잡한 시가지에서의 전투는 매우 많은 제약을 받는다.

특히 이런 지역에서 보병의 지원이 없는 경우 전차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관’ 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강한 펀치력과 더 강한 맷집에 대한 열망은 역사상 전무후무할 거대병기 초중전차(超重戰車) 의 탄생을 불러왔다.

마우스 전차
히틀러의 야심작 초중전차 마우스(Maus). 128mm 주포 옆에 붙어있는 75mm 부포가 당시 주력전차들의 주포로 사용되던 포 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우스의 거대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덩치의 전차는 실용성이 매우 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말미암아 전차의 방어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단순히 철판을 두껍게 하는 방법 외에는 딱히 없었다. 또 200톤에 달하는 전차의 몸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엔진과 현가장치는 불과 수 킬로미터의 운행에도 박살나기 일쑤였다. 일례로 초중전차의 대명사인 마우스 전차의 경우 등장 시기가 대전 말기로써 이미 제공권은 연합국 측에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대낮일 경우 도로에 독일군의 차량이 한두 대라도 이동하면 사방에서 전폭기가 날아와서 로켓탄과 기총소사를 퍼부어 대던 시절 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우스 전차의 육중한 몸이 도로를 따라 기동한 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 했고 실제로 실전투입 없이 시제기로 단 2대만이 제작된 후 전후 연합국의 손에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본 게시물은 과거 필자가 매일경제에 기고했던 칼럼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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