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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설

조선 판옥선

by 미사리 건더기 2024.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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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 장군

수 백 개의 국가와 영주국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거듭해온 중세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는 명나라를 구심점으로 하는 ‘Pax sinica’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던 조선 역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겐페이 전쟁 이후 근 100년간 지속되어온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과 더불어 동아시아는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러한 야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아시아의 조용한 나라였던 조선에서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을 배출하게 하였다. 해전사에 국한하여 볼 때, 그가 도입한 함대의 일사분란한 원거리 집중 포격술에 기반한 함대전 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판옥선 삽화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해전의 양상은 원거리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투발(投發)무기를 투척하여 갑판 위의 전투요원을 살상한 뒤 배를 갈고리로 끌어 당겨 선상 위의 백병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당시 조선군의 주력전함이었던 판옥선의 튼튼한 몸체가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각종 중화기를 탑재한 뒤 원거리에서 전열을 형성하여 일제 사격으로 접근하는 적함을 격침 시키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세계 최초로 도입된 화력전 중심의 이런 전술은 판옥선의 기능적 장점과 더불어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이 결합되어 명실상부 동아시아 최고의 수군을 만드는데 일조 하였다.
 

2. 판옥선의 특징

영화 명량을 보면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십여 명의 조선 군이 전사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는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연출이고 실제 명량해전시 조선군 전사자는 단 2명(!)에 불과 했다.(실제 전사자 숫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함) 이러한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에 기인한 것이지만 판옥선의 우수성 역시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판옥선은 과연 어떤 선박이었을까?

판옥선의 기원은 고려시대 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역시 조운선(漕運船) 을 통해 지방에서 거둔 곡물을 실어 날랐는데 이때 사용된 조운선중 전투에 적합한 크기의 함선을 전투함으로 사용하였다. 이 전투함들을 ‘맹선’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과 유사한 선체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삼포왜란 당시 처음 등장한 일본의 안택선과의 전투에서 한계를 노출하자 맹선보다 큰 전투함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결국 조선 명종때 기존의 맹선위에 갑판을 1층 더 올리고 선체의 크기를 늘린 판옥선이 처음 등장 하게 되었는데 초기의 판옥선에는 50여명의 승조원이 탑승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약 200명의 승조원이 탑승 할 수 있을 정도로 선체의 크기가 커졌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평평한 사각형의 선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평저선이라고 한다. 평저선은 회전반경이 좁고 기동성이 탁월하여 한반도 연안에서 운용하는데 매우 적합한 형태이다. 또한 선체를 소나무와 참나무로 건조하여 매우 단단하였고 이음새는 나무못을 박았는데 오랫동안 바닷물은 머금은 나무못은 부피가 더 팽창하여 이음새를 단단히 해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렇게 단단한 선체에 30문이 넘는 각종 화포를 장비하여 적함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 하였다.

또 2층으로 갑판을 올린 덕에 판옥선의 체고가 상당히 높아진 관계로 임진왜란 초기 일본 수군의 주력 함선이었던 세키부네(関船)로 단병접전을 하려면 사다리를 동원해서 판옥선 위로 올라와야 할 지경이었다. 높은 체고 덕분에 조선 수군들은 높은 상갑판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적군에 사격을 하는 것이 가능 했다.
 

3. 일본 수군의 주력함 세키부네 

일본 수군의 주력함선은 세키부네(関船)와 아타케부네(安宅船) 2종류 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수군의 대다수는 세키부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세키부네의 대형함선 급인 아타케부네는 장수들의 기함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수군의 대형전함 이었던 아타케부네. 당시 일본의 전함들은 고전적인 백병전을 위해 삼나무 등 얇고 가벼운 나무로 배를 만들어 기동성을 확보하였으나 이로 인해 판옥선과 달리 중화기의 탑재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궤멸적인 패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배를 통틀어 화선(和船)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화선들은 삼나무 등 가벼운 재질로 건조 되었고, V자형의 침저선체를 지니고 있어 속도가 빨라 신속하게 적함에 접근하여 단병접전으로 승부를 가리는데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단 이로 인해 내구성은 매우 떨어졌고 판옥선과 달리 쇠못을 이용해 선체를 접합 하여 부식과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하였다. 이러한 내구성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군과 같이 배에 화포를 장비하지 못했으며 판옥선의 당파공격에 매우 취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임진왜란 중기에 이르러 일본수군도 판옥선에 대항하기 위해 세키부네를 더욱 대형화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판옥선처럼 기능적 특성을 살려 층을 나눈 것이 아니고 (1층 전투실은 함포 배치, 2층 전투실에는 활로 무장한 사수들과 근접전에 대비한 살수 배치) 단순히 판옥선에 단병접전을 시도하기 위해 층을 올린 형태에 불과 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원거리 화포 사격 위주의 전술을 펼쳤기 때문에 화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세키부네들은 제대로 접근 조차 하기 전에 격침되기 일쑤였다.

판옥선의 주요 화기중 하나였던 현자총통. 4kg에 달하는 쇠화살인 차대전을 사용할 경우 사정거리가 1.2km 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4.판옥선과 조선수군이 가지는 의미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거둔 수많은 승리들은 단순히 지엽적인 사건들이 아니었다. 한산도, 명량, 노량의 3대 해전은 물론이고 그 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소한 수십 번의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거의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서해를 가로질러 수륙병진으로 조선을 침공하려던 일본군의 전략이 완전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수군의 활약 덕에 조선의 곡창지대였던 전라도 지역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고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미를 조달 하려던 일본군의 계획 역시 좌절되었다. 또 육전과 달리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꺾일 데로 꺾인 일본수군은 조선수군만 보면 도망다니기 바빴고 거의 괴멸상태에 빠진 일본 수군은 전투는 고사하고 보급품 조차 제때 운반하지 못해 일본군은 만성적인 보급부족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임진왜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명군의 참전과 의병들의 분전에 힘입어 조선육군도 점차 승기를 잡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패색이 짙었던 임진왜란 초기 조정의 지원은 고사하고(당시 선조는 무능한데다 이순신 장군을 칭찬하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조차 이순신 장군을 폄하할 정도로 시기심 많고 옹졸한 왕이었다) 오히려 공물을 올려 보내야 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기대이상의 활약으로 패전의 늪에서 조선을 구해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불침의 전함 판옥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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