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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7편

by 미사리 건더기 202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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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1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1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1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2년 만인 1941년 6월에 개시된 독일의 소련침공, 그리고 12월 7일 일본의 미국 진주만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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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2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2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1편 보러 가기2024.11.11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1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1편역사는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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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3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3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2편 보러 가기2024.11.20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2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2편제2차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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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4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4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3편 보러 가기 2024.11.25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3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3편제2차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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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2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5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5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4편 보러 가기2024.11.27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4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4편제2차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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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9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6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6편

2024.11.11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1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1편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의 전격적인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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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탈린은 과거 폴란드와의 역사적 앙금과 영토 때문에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1941년 6월 21일 저녁 소련발 독일행 열차 한대가 독-소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 열차에는 소련에서 독일에게 원조해주고 있던 크롬, 구리, 망간 등의 각종 원자재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뒤인 6월 22일 새벽 3시 30분경 인류 최대의 그리고 인류 최악의 대절멸 전쟁이었던 독소전이 시작됐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소련은 독일에 막대한 양의 물자를 지원해주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도대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왜 벌어진 것일까요? 무려 35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독일군이 동부전선에 꾸역꾸역 집결할 때까지 소련 아니 스탈린은 과연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NKVD를 위시한 소련 방첩기관들은 죄다 눈뜬 봉사였을까요? 그럴 리가요. 심지어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리하르트 조르게라는 스파이는 이미 수주 전부터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날짜까지 정확한 정보를 스탈린에게 보고합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모종의 이유를 들어 이를 영국과 프랑스의 기만작전이라고 생각하며 보고를 묵살합니다. 

리하르트조르게
리하르트 조르게


히틀러는 집권이전부터는 물론 집권 후에도 끊임없이 공공연하게 유대인과 볼셰비키 (다수 과격파 공산주의 분파를 일컫는 말)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상정하고, 아리아 민족의 생존권인 레벤스라움을 구축하기 위해 소련의 영토가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당연히 소련은 물론 서방 연합국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고 서로 폴란드로 쳐들어 갔을 때 전 세계가 경악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했던 독일과 소련이 무슨 연유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일까요? 
 
물론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폴란드와 러시아제국 간의 기나긴 분쟁의 역사를 그 이유로 대는 경우도 있지만 세상만사 그렇듯 본질은 더욱 복잡했습니다. 
 

1. 조약 체결의 배경

사실 스탈린은 독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하고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체코와 폴란드가 모두 독일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경우 소련은 대놓고 자신들을 적대시하던 독일과 국경을 바로 맞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스탈린은 최대한 독일을 구슬려야 했습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제국의 후신인 바이마르 공화국과 공산당의 집권으로 인해 온 유럽의 잠재적 적국이 된 소련은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독일은 소련에 각종 기술을 이전해 주는 대가로 소련은 광대한 영토에서 독일군의 기동훈련장과 각종 자원을 제공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틀러 집권 후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었습니다.  

라팔로조약
유럽의 왕따였던 바이마르공화국과 소련의 밀약이었던 라팔로 조약


특히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히틀러의 손에 떨어지자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로 합니다. 즉, 영국, 프랑스와의 교섭을 통해 동맹을 맺고 독일에 대항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독일의 끊임없는 팽창정책에 전운이 고조되자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에 합의하고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하게 됩니다.
 

2. 영국과 프랑스의 삽질 

그러나 막상 협상이 시작되고 보니 영국, 프랑스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습니다. 협상에 참여한 영국과 프랑스 대표는 협상체결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가지지 못했고 심지어 급도 낮았습니다. 스탈린이 최측근이자 오른팔인 보로실로프 원수에게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고 협상장에 보냈던 것에 비해 상당히 성의가 없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벌 어질 경우 즉각 1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며 실전력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소련, 영국, 프랑스의 상호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동원 가능한 사단이 110개에 달하긴 하지만 각국의 방위는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영국의 경우 소련의 거듭된 추궁 끝에 완편 되어 즉각 전투에 투입가능한 병력이 고작 2개 사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토하게 됩니다. 소련은 이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소련은 현재 독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이에 따라 즉시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만큼이나 공산주의 소련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독일과 소련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즉각 개입해서 소련을 돕기보다는 두 나라가 힘에 부칠 때까지 싸울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 역시 영국과 프랑스의 이러한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고 독일을 자극하여 자신들을 독일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 의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네빌체임벌린
뮌헨 협정서를 흔들며 의기양양해 하는 네빌 체임벌린


실제로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 회의적이었고, 체코의 주데텐란트 지방을 독일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에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라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습니다. 

 

3. 히틀러의 접근 

상황이 영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에 대항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틈을 놓치지 않고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접근합니다.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반씩 분할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은 스탈린으로써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습니다. 
 
물론 스탈린이 의심병의 아이콘이었던 만큼 히틀러를 믿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독일이 영국 점령을 끝낼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고, 폴란드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할 수 있는 만큼  적어도 소련의 전력 현대화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1942년 까지는 히틀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합니다.

몰로토프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하는 소련측 외무부장관 몰로토프


그렇게 그때까지도 한 달여간 질질 끌며 지지부진하던 영국, 프랑스의 협상을 중단한 소련은 1939년 8월 23일 단 하루 만에 독일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그날로 폴란드와 유럽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약 일주일 뒤인 1939년 9월 1일 독일군과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4. 결론

결국 독소 불가침 조약은 당시 군사면에서 만큼이나 외교적으로도 똥볼차기를 일삼던 영국과 프랑스의 삽질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으며, 처음부터 영국, 프랑스가 3국 협상에 적극적이고 성의 있게 임했다면 장장 6년에 걸친 대살육과 지옥 같은 전쟁은 조기에 마무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카틴숲학살
카틴숲 학살 유해 발굴 현장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의 면죄부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련은 인류의 영원한 적인 나치독일과의 야합을 통해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이른바 카틴숲 학살을 통해 조직적으로 폴란드 엘리트 층을 학살해 폴란드를 재기불능상태에 빠뜨리려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불과 2년도 안되어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2천2백만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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