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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1편

by 미사리 건더기 202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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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2년 만인 1941년 6월에 개시된 독일의 소련침공, 그리고 12월 7일 일본의 미국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바야흐로 유라시아대륙과 아프리카대륙을 넘나드는 전 지구적인 규모의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수천만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인류역사에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큰 사건이었던 만큼 전쟁 중 또는 전쟁이 끝난 직후 남겨진 관련한 수많은 사료와 기록들이 남아 있고, 종전 80주년을 목전에 둔 오늘날 까지도 새로운 자료들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단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기록이나 사료도 있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왜곡시킨 자료도 있습니다. 그런데 버젓이 팩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이를 부정하고 정신승리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거부감이 있는 수사입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 이 주장은 몰라서 그렇든 알면서도 그렇든 역사 왜곡을 일삼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주류 역사학계에 편입이 되는 가설 또는 주장이 그렇게 허술하게 
인정받는 건 아닙니다.
 
우리같은 일반인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이벤트들의 큰 줄기는 물론 거기서 파생된 파편화된 토막지식들 하나하나까지도 역사학자들이 단순히 관련기록 한 두줄 읽고 나서 역사책에 기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빙성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그간 주류로 인정받았던 학설이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사료 간의 교차검증을 기반으로 해당 시기의 사회, 문화, 정치상황등을 신중히 고려하고 그중 가장 합리적이고 신빙성이 있다고 사료되는 내용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죠.
 
자칭 백두혈통을 참칭 하는 김일성을 두고 아무리 북한에서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라고 기록을 해도 후대에 그 기록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확률은 매우 미미 합니다. 일억 번 양보해서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하는 데 성공해서 승자가 됐다고 해도 후세 사람들이 장군님이 축지법을 진짜 썼는지 안 썼는지에 대한 답은 금방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세계대전 중 있었던 여러 사건 들 중 이른바 '독일 국방군 무오설' 또는 '미국의 진주만 공습 유도설' 등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널리 퍼진 이야기 혹은 특정한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왜곡된 주장들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제가 다뤄보고 싶은 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독일군의 전격전은 실제 했는가? 
2. 폴란드 기병대는 전차가 뭔지도 몰라서 독일 기갑사단에게 정면돌격을 감행했다?

3. 독일군의 기갑부대는 정말 막강했는가? 

4.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이 지리멸렬했던 것은 스탈린이 유능한 장교들을 숙청했기 때문이다?
5. 소련은 단순히 인해전술로 독일을 밀어붙였나? 
6.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독일을 이긴 전쟁이다?
7. 전쟁기간 동안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대부분 무장친위대 짓이었다? 
8.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조하였다? 
9. 스탈린은 과거 폴란드와의 역사적 앙금과 영토 때문에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10. 미드웨이 해전은 미국이 일본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긴 전투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는 상당히 민감한 주제들도 있으나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해당 주제들에 대해 썰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전격전은 실제 했는가?

 
전격전은 독일어 Blitz Krieg의 번역어로 번개를 의미하는 Blitz와 전투를 의미하는 Krieg을 조합한 단어입니다. 제2차 대전 초반 독일군은 기갑부대와 공군을 앞세워 전광석화처럼 폴란드와 프랑스를 각각 단 몇 주 만에 함락시켰고 이와 같은 눈부신 서전의 승리는 바로 독일군 특유의 전격전 때문이었다는 얘기는 제2차 대전 당시부터 현재까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독일군
1939년 9월 폴란드 점령후 퍼레이드 중인 독일 국방군(Wehrmacht)


심지어 마치 일종의 공식처럼 야포로 전선을 포격하고 급강하폭격기로 적의 방어거점과 주요 통신, 지휘시설을 폭격하고
이어 뒤따르는 강력한 기갑부대가 약점을 돌파하고 계속 전진하면 패닉에 빠진 적 주력을 후속하는 보병부대가 격파했다고 합니다.


 


일견 그럴 듯 해보이는 이야기지만 이 가설에는 몇 가지 오류가 존재합니다. 
 
1. 독일군은 단 한 번도 전격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일반화된 전술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음 
 - 이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전격전이라는 단어 자체는 한 영국기자가 만든 조어였습니다. 독일군의 진격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이뤄진 것을 두고 붙인 별명인데 독일군이 입체적인 공지합동작전으로 빠르게 방어선을 돌파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무형 지휘체계에 숙달된 현장 야전 지휘관들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공군 연락장교가 지상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요충지에 효과적인 항공지원을 요청하고 전과를 확대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긴 하였으나 이는 특정 전술체계를 모범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 독일장교단의 우수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거둔 성과에 더 가까웠습니다. 또한 전격전 이론처럼 보병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기갑부대만 독자적으로 적 종심으로 진격할 경우 종심방어 체계를 구축한 상대가 기동방어를 펼칠 경우 각개격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이런 위험한 전술을 교리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폴란드를 침공중인 독일 기갑부대의 행렬


2.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는 잘 방어된 진지를 돌파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체였음 
- 애초에 독일군은 2차 대전 개전 시까지 전혀 준비가 되어있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폴란드전역 종료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탄약재고는 단지 2주 치에 불과했으며 폴란드 전역은 물론 프랑스 침공 때까지도 독일 기갑사단의 주력은 기관총 또는 기관포로 무장한 1호, 2호 전차였습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전차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경장갑차량이었으며 이에 반해 프랑스군은 제대로 된 화력과 장갑으로 무장한 전차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직화된 프랑스 기갑사단의 반격이 제대로 있었을 경우 전멸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을 비교해 봤을 때 결국 가믈랭 원수를 위시한 프랑스군 똥별들의 무능과 삽질이 아니었다면 결코 독일군이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2호전차
20미리 기관포와 7.92mm 기관총으로 무장한 2호 전차


3. 독일군의 기본교리는 적 주력의 섬멸이었음
- 프로이센 제국 시절부터 독일군의 기본 교리는 신속한 기동을 통한 적 주력의 포위 및 섬멸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렌넨캄프와 삼소노프가 지휘하던 러시아군이 제대로 된 반격도 한번 못해보고 괴멸된 데에는 독일군의 이러한 유서 깊은 전술교리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전해지는 것처럼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 기갑부대들이 계속 종심으로 진격하고 고립된 단위부대들이  마비 상태에 빠져 교전의지를 상실시킨다는 이른바 마비 전략은 사실 독일 보다는 소련의 전술교리에 더 가까웠습니다. 

당시 독일 기갑사단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뒤 적극적 교전을 통해 후속하는 보병부대와 협동으로 적의 주력을 섬멸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적의 방어능력을 와해시켰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러시아 병사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강력한 기갑부대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전으로 인해 폴란드와 프랑스가 패전했다는 주장은 사실 허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 흔히 하는 말로 운칠기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일이 성공했을 때 운이 70%로 기량이 30%라는 말로 그만큼 운이 중요하다는 말의 대명사로 쓰이는 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상황이 딱 이랬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10만의 병력으로 제한받았을 뿐 아니라 전차 등 중화기의 보유도 금지당했으며

해군과 공군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습니다. 여건상 도저히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군을 재건하기 위한 한스 폰 젝트 장군의 눈물겨운 노력이 없었다면 독일군은 프랑스 점령은커녕 폴란드 전역에서 대패하고도 남았을 수준이었습니다. 

한스폰젝트
국방군의 사열을 받는 독일군의 아버지 한스 폰 젝트 장군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주도하에 10만 명의 병력은 모두 임무형 지휘체계의 숙달로 인해 각 병사들은 부사관 수준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훈련받았으며, 부사관들은 장교 수준의 훈련을 받는 등 훗날 병력제한이 풀어질 경우 순식간에 수백만의 

군대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육성되었던 것입니다. 

 

독일 군부는 히틀러에게 1944년이나 돼서야 전쟁을 위한 1단계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보고 했으나 개인적 야심은 물론 전시경제체제로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독일경제 상황을 고려했을 때 1944년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결국 1939년 3월 

체코의 수데텐 란트 합병을 시작으로 독일은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군수지원이나 전력 확보도 안된 상태에서 무턱대로 폴란드를 침공했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한스 폰 젝트 장군이 키워낸 유능한 장교단과 부사관들의 활약덕에 간신히 폴란드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태 파악을 못한 히틀러는 자신이 군사천재라고 착각했고 이런 망상은 역시 유능한 장교단과 부사관들을 갈아 넣어서 달성한 프랑스 점령을 기점으로 정점에 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독일군이 체계적인 전술교리로 전격전을 채택했고 이런 전술교리를 바탕으로 폴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한 히틀러의 도박이 무능하고 의지 없던 초반 연합국 사령부의 실책이라는 제물을 발판 삼아 성공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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