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Omnes viae Romam ducunt (All roads lead to Rome)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유명한 영미권의 속담이 있다. 수 천년 전 고대 유럽국가였던 로마의 이름이 들어간 속담이 머나먼 한국에서도 통용되는 것을 볼 때 로마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는 당대 동서양을 불문하고 가장 선진적인 법률, 문화, 기술체제를 보유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했던 로마제국의 근간에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근대화된 로마군단이 있었다.
시대를 앞서 갔던 로마군
1) 장비의 표준화
로마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시대를 뛰어넘는 선진적이고 효율적인 조직체제를 지녔다는 점에 있다. 중세 이후 등장한 근대 국민국가가 보유한 군대와 이전 시대의 군대가 가진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군 장비의 제식화와 표준화였다. 군대에서 장비의 제식표준화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표준화된 장비의 지급은 손실, 소모된 장비의 원활한 제조 및 보급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북아프리카에서 작전중인 1군단의 병사들이 보유한 방패와 투창, 단검의 디자인과 성능은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유럽에서 게르만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2군단 병사들의 그것과 동일했다는 뜻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 장비의 표준화는 요원한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장비의 표준화가 유럽의 일부 강국에서만 자리 잡는데도 1,5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2) 역사상 최초의 도입된 상비군 제도
장비의 표준화와 더불어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전문 상비군 체제 역시 로마군이 강군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제정로마는 약 5천 명으로 구성되어 독자적인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던 군단 (Legion, 레기온)을 상시적으로 30개 이상 보유 하고 있었다. 지금의 개념으로 이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당시 이러한 상비군 제도를 보유한 나라는 로마가 사실상 유일하였다. 동시대 다른 대부분 국가의 병사들은 평상시에는 농업, 수렵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무기를 지급받고 전쟁터에 불려 나가는 형식이었고 따라서 전문적인 군사적 훈련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속부대 자체의 소속감이나 인접 부대와의 유기적인 협동 전술 등은 요원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비군으로 편성되어 10년 이상 같은 부대에서 전우들과 복무하며 단체생활과 매일 군사훈련에 전념에 온 로마군은 각 부대 구성원들의 자질이나 부대에 대한 소속감이 매우 우수한 편이었고, 소속부대의 지휘관과 인접부대와의 펼치는 유기적인 작전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았다.
반면 당시 로마군을 제외한 대부분 유럽지역 군대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닌 느슨한 부족의 연맹 혹은 혈맹체가 보유한 전투 집단으로서, 이들은 전문적인 군인이 아닌 ‘전사’ 들의 집단에 불과했으며, 개개인의 신체, 전투 능력은 로마군 보다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난투극이 아닌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유기적이고 전문적인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로마군에게 언제나 열세를 면치 못했다.
3) 근대적인 편제
앞서 언급한대로 로마는 상시 30개 이상의 상비군단 즉, 레기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레기온들은 독자적으로 전략적 목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된 최소의 편제 단위로써 현대 군의 사단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현대의 육군 사단은 개별적으로 전략적인 목표달성이 가능한 최소단위로써 각 사단은 독자적으로 보병뿐이 아닌 포병, 전차, 공병 등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놀랍게도 2천 년 전 고대 국가의 군대라고는 믿기지 않게 로마군 역시 편제된 각 군단 내에 기병, 경보병, 중장보병 등 다양한 병과의 부대를 편제, 1개 군단으로 운영하여 작전의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대 편제는 2,000년이 지난 21세기 대부분 국가의 현대적 육군편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혁신 적인 것이었다.
로마 레기온(Legion)의 주력은 현대 군의 대대에 해당하는 10개의 코호트 (Cohort)로 구성되었다. 각 레기온 내의 정예였던 제1 코호트의 경우 160명으로 이루어진 5개의 센츄리온(Centurion)을 보유하였고 나머지 제2~제9 코호트는 80명이 한 단위인 8 개의 센츄리온으로 구성되었다. 여담이지만 성경책에 자주 언급되는 로마의 백부장 혹은 백인대장은 오늘날 육군의 중대장에 해당되는 바로 이 센츄리온의 지휘관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와 더불어 로마군이 강했던 이유는 바로 기본에 충실한 군대였다는 데 있었다. 로마군은 전장의 모범생이라고 불릴 만큼
우직했는데, 단적인 예로 이동 중 단 하루를 묵더라도 반드시 숙영지를 편성하고 참호를 구축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던 것이다.
따라서 적이 야음을 틈타 야영 중인 로마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차라리 망상에 가까웠다. 실제로 반나절만에 뚝딱 이런 수준의 숙영지를 건설하는 것을 보고 적이 아예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로마군 최대의 패배 토이토부르크숲 전투
하지만 이런 불패의 로마군에게도 치욕적인 패배의 역사는 있었다. 지중해의 무역강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벌인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칸나에 전투에서 대패한 바 있었고 파르티아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는 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로마가 한낱 야만인 부족들로 여기며 멸시 했던 게르만족에 의해 정예 로마 군단들이 몰살당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이후 유럽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을 만큼 파급효과가 컸던 전투였다.
로마는 중부유럽지방의 최대판도를 엘베강 유역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중장기 과제로 삼았고, 이를 위해 당시 중부유럽에서 군사적 원정을 감행함은 물론, 여러 부족국가로 나뉘어 있던 게르만족들을 회유, 이간질시키는 등 2~3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서기 6년 당시 게르마니아에는 11개의 로마군단이 주둔하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발칸지역의 속주 반란으로 인해 게르마니아 총독을 포함한 8개의 군단을 긴급히 차출시켰고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후임으로 바루스를 총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바루스는 기존에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총독을 역임하며 그 능력을 입증받았는데 그 능력이라는 것이 강압적으로 속주를 통치하며 가혹한 세금을 거두는 것이었다. 게르만 부족들은 바루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호전적이었으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히고설켜 있었으나, 바루스는 대로 이들을 회유, 포섭하는 대신 늘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려 했고 이러한 바루스의 통치방식 탓에 게르만족의 불만은 점차 깊어져 갔다.
서기 9년, 게르마니아 지역의 일부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바루스는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로마제국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르만족 출신 부관 아르미니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당시 휘하에 있던 3개 군단 및 보조병력 등 총 3만여 명을 직접 지휘하여 반란을 진압하기로 한다.
전투경험도 없었고 게르마니아지역의 지리에도 어두웠던 바루스는 부관 아르미니우스에게 길안내를 맡겼는데 목표지점으로 가는 지름길로 안내하겠다며 로마군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원시림이 무성한 게르마니아 지역에서도 울창하기로 유명했던 토이토부르크 숲 이었다.
당시 로마군의 대열은 좁고 울창한 숲을 통과하기 위해 길게 늘어져 그 대열이 20km 에 이르렀는데 이는 로마군뿐만이 아닌 로마병사들의 가족 및 군속들까지 행렬에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로마군 대열이 숲 속 깊은 곳까지 도달했을 무렵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로마군을 지원해줄 본인의 부족 전사들을 불러오겠다고 보고하고 숲으로 사라졌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로마군을 향해 2만이 넘는 게르만 부족 전사들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된다.
로마군은 특유의 보병 밀집대형을 통한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한 전술로 유명했는데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울창했던 토이토부르크 숲의 좁은 길에서는 이러한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이 불가능했던 데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덕분에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게르만 전사들과 로마군이 내지르는 고함과 비명소리가 숲속을 가득 채웠고 처절한 전투는 그날 저녁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훈련과 실전으로 단련된 로마군은 처절한 사투끝에 간신히 게르만족 전사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짐마차와 갖가지 물품으로 숙영지를 급조하고 하룻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본 대로 복귀하기로 마음을 굳힌 바루스는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퇴로에 올랐고 로마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게르만 전사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역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로마군의 피해는 점점 늘어만 갔다. 그날도 해 질 녘이 돼서야 게르만족의 공격이 멈췄고 바루스는 조급함을 넘어 이성을 잃고 있었다.
행정관료로서의 능력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군사적 식견은 제로에 가까웠던 바루스는 급기야 그날 저녁 숙영지를 편성하고 방어대형을 갖추는 대신 익숙치 않은 무성한 원시림을 헤쳐 야간행군으로 숲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바루스의 부관으로 근무하며 바루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던 아르미니우스는 이를 예측하고 예상 행군로 앞에 방벽을 쌓은 채 행군로 양쪽에 게르만 전사들을 매복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로마군의 행군대형이 방벽에 도달했고 당황해하는 로마군단병들을 향해 자비없는 투창세례와 함께 게르만전사들의 일제공격이 시작됐다. 이틀째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피로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로마군은 느닷없는 공격에 공황상태에 빠졌고 그때부터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변했다. 이 상황에서 지휘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기병대장이자 부사령관은 도주하다 생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로마군의 전멸이 확실해지자 바루스를 비롯한 참모들은 모두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전투로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은 문자 그대로 괴멸되었으며 가까스로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로마군 패잔병과 가족들, 군속까지 모조리 처형되었다. 이때 게르만족은 처형한 로마군들의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뽑아 토이토부르크 숲 전역에 진열해뒀다고 한다. 이때 전멸한 3개 군단은 이후로도 로마군 군단편제상 영구결번으로 남게 된다.
이 전투에서 로마의 3개군단이 전멸하면서 중부유럽에 대한 로마의 최대 영토는 라인강 좌측까지로 한정되었으며, 이후 로마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이 경계를 넘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게르마니아 지역의 게르만족들은 특유의 문화와 풍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이때 로마군을 유인해서 격멸한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의 우상으로 추앙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476년 게르만족이었던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역사의 큰 변곡점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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