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열보병이란?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사나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동아대백과사전에도 늘 전쟁사 부분만 닳아있을 정도로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나 미국 남북전쟁 파트를 보면서 늘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 있습니다. 뭔가 총을 쏘긴 쏘는데 전쟁영화에서 처럼 군인들이 엎드리고 구르고 뛰고 하는 게 아니라 꼿꼿이 서서 서로 총을 쏘는 삽화가 특이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휘관이 바보라 그런가 했다가 아니면 그림이라 그런가라는 생각도 하고 이래저래 나름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그 당시에는 왜 빽빽하게 모여서 꼿꼿이 선채 서로 총격을 주고받았을까요?
나중에 좀 더 머리가 굵어지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다는 사람의 생명에 알보병은 해당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에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병의 변천사' 편(2024.11.04 - [밀리터리 잡설] - 수박 겉핥기로 보는 기병의 변천사 2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세기에 들어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전장의 주 무기로 등장함에 따라 보병이 전장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200여 년에 걸쳐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동요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총을 쏘고 돌격하고 했던 보병대를 일컬어 전열보병(Line Infantry)라 칭합니다. 전열보병 전투력의 핵심은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더불어 칼 같은 군기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에 다소 무식해 보이는 이런 전술이 사용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당시 주력으로 사용됐던 총기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17~19세기 중반까지 주로 사용되던 총기는 머스켓 총이었습니다. 요새 인기 많은 샤인 머스켓의 그 머스켓 맞습니다. 지금이야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만 해도 탄두와 탄피가 합쳐진 실탄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사격을 위해서는 총을 바닥에 세우고 제일 먼저 화약을 총열 안에 부어넣은 뒤 샤인 머스켓만 한 납구슬을 넣고 꼬질대로 이를 잘 다진 뒤에 방아쇠 옆에 달린 화약접시에 화약을 조금 넣고 나서야 사격준비가 끝났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화약접시를 타격하고 그럼 그 폭발로 인해 발생한 불씨가 총 안으로 들어가서 총열 안에 들어 있는 화약을 폭발시키고 이 힘으로 납탄이 발사되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발사과정으로 인해 발사속도는 아무리 빨라야 분당 3발을 넘지 못했고 현대의 총기와 비교하면 명중률이나 사거리도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거기다 무연화약을 쓰는 현대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불순물이 많은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관계로 한번 사격을 하고 나면 온통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조준은커녕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죠.
또한 장전을 하려면 화약을 넣고 총열 지름과 거의 비슷한 납탄을 총열에 쑤셔 박아야 했는데 안 그래도 기다란 머스켓 소총을 가지고 이런 동작을 앉거나 엎드려서 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격훈련은 보병 개인 한 명 한 명이 신중히 조준해서 명중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긴 횡대 대형으로 늘어서서 장교나 부사관의 지휘하에 일제히 사격을 개시해서 일종의 화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이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사격 시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관계로 18세기 당시 영국군은 보병들에게 적의 흰자위가 보일 때 사격을 하라고 교육시킬 정도였습니다. 이때 일사불란한 사격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만큼 명령보다 먼저 쏘거나 늦게 쏜 병사가 있을 경우 전투가 끝나면 부사관에게 끌려가 초주검이 될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보병들은 적에게 불과 4~50미터 지근거리까지 근접하여 빽빽하게 늘어선 채로 일제 사격을 주고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교전이 일단 발생하면 이기든 지든 당연히 사상자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맨 첫 줄에 선 병사는 그야말로 총알받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군대는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구타와 가혹한 체벌이 일상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다시 말해 맨 앞열에 설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죽을 수는 있지만, 자리에서 이탈하면 100% 맞아 죽는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이렇듯 가혹한 체벌을 했던 것이죠.
그 결과 전진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옆자리 동료들이 적탄에 맞아 줄줄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며 천천히 전진하는 기계 같은 병사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히 대열을 맞추어 전진하고 방향을 바꾸고 대형을 변경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기계같이 수행할 수 있는 군대일수록 전투력이 강했고 이런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각 국은 끊임없이 병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오늘날까지 내려져 오는 제식훈련의 기원입니다.
두 번째, 전열보병들의 출신성분(?)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각국은 의외로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선택했는데 당연히 급여도 낮은 데다가 불구가 되거나 개죽음당하기 딱 좋은 군대에 자원입대를 하려는 사람이 많을 리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은 보통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지역의 젊은이들이나 갈 곳 없는 부랑자들 떠돌이 범죄자들이 주를 이뤘고 이로 인해 당시 전열열보병의 인적자원은 제식훈련받은 산적 떼와 별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워털루 전투의 주역인 영국의 웰링턴 경은 휘하의 병사들을 일컬어 '술 마시러 입대한 쓰레기 놈들'이라고 경멸 어린 말을 내뱉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탓에 병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수시로 약탈 또는 탈영을 저질렀고 이런 거친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시키기 위해서는 지휘관이 상시적으로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개별적으로 은엄폐를 하며 전투하거나 하는 능동적인 전술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이런 병사들에게 오로지 기계처럼 전진하고 총을 쏘며 꼿꼿이 자리를 지키게 할 수만 있다면 '술 마시러 입대한 쓰레기 놈 들'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거나 알바가 아니었죠.
세 번째, 통신기술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자욱한 화약연기로 인해 깃발로 수신호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휘관은 먼 곳에서 망원경으로 적 부대와 아군의 배치 교전상황등을 지켜보며 수시로 전령을 보내 전투를 지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때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군복의 차이가 명확해야 했고 또 병사들이 밀집대형으로 서 있어야 위치파악이 용이했습니다.
이렇게 전열을 유지해서 싸우는 방식은 1836년 최초의 후장식 소총이었던 드라이제 니들건 (Needle gun)의 도입으로 인해 그 한계가 명확해졌으며, 탄피방식의 총알이 발명되고 이에 따라 화기의 발사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전장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등장한지 불과 200 년만에 빠르게 자취를 감춘 전열보병들이지만 특유의 화려한 전투복과 더불어 자욱한 화약속에 일제 사격을 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히 자리매김 했고, 오늘날까지 각종 영화, 게임등에 등장하는 것은 물론 각종 응원단, 고적대 등의 화려한 제복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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