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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설

수박 겉핥기로 보는 기병의 변천사 1편

by 미사리 건더기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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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의 기원

  • 1 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

기병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입니다.

 

기병은 기원전 5~6세기 경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외로 전장의 핵심병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최초 등장 후에도 한참이 지난 서기 3~4세기 경부터였습니다. 
단, 이건 동양기준이고 서양의 경우에는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난 9세기 무렵까지 보병의 보조병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등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안장을 올린 말의 등에 타서 양 발을 등자에 끼운 모습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 간단해 보이는 장치인 등자의 발명은 전장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등자의 발명이전, 기병은 전투 시 양 허벅지로 말의 몸통을 꼭 조이고 양손을 휘둘러 활을 쏘거나 각종 냉병기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기병의 피로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고 말 위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로마군
등자없는 말에 올라탄 채 전투 중인 로마기병대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위해 전차가 등장하게 됩니다. 전차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루 쓰였는데 보통 2 필 이상의 말이 끄는 전차에 2~3명이 탑승하며 1명은 마부, 다른 1~2명은 활이나 각종 무기로 무장한 전투원이었습니다.

전차가 활약하던 시기의 보병들은 대개의 경우 제대로 훈련 받지도 못하고 빈약한 무기와 방어구로 무장한 어중이떠중이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잘 훈련된 기수들이 조종하는 전차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인도군
고대 인도군의 3인용 전차


실제로 고대 중국의 경우 전력은 곧 전차를 의미했고 일반 보병은 전력으로 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차에도 단점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운용할 수 있는 지형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차라고는 해도 그 원리는 바퀴 달린 수레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구조인 탓에 산악지형이나 평지라도 바닥이 울퉁불퉁한
암석이 많은 지형에서는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또 기동력도 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었던 지라, 본격적으로 훈련받은 보병들이 전장에 등장하자 빠르게 입지가 축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차는 훗날 퍼레이드나 경주용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됩니다. 

 

등자의 발명 

 

기병
등자의 발명으로 다시 씌여진 기병의 역사

 

그럼 등자의 발명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단순히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일까요? 
등자의 가장 큰 장점은 기수를 말 등에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게 됨에 따라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병들의 충격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중장기병이 거대한 기병창(Lance)을 겨드랑이에 끼고 전속력으로 질주해 냅다 적에게

창을 꽂아 버리는 전술을 바로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고 불렀습니다. 

 

일단 아군과 상대방의 주력인 기사들이 한바탕 접전을 통해 한쪽이 패주 하게 되면, 승리한 쪽의 기사들은 상대편 보병들에게 카우치드 랜스를 감행했는데 이때 말의 질주하는 속도에 무장한 기사와 말의 질량이 합쳐진 관계로 카우치드 랜스가 성공할 경우 랜스 하나에 보병 두세 명이 관통될 정도로 운동에너지가 컸습니다.

 

일단 카우치드 랜스에 성공한 경우 창을 다시 주울 수가 없었기에 기사들은 다시 본진으로 돌아와 새로운 랜스를 장비하고 

상대편 보병 대형에 카우치드 랜스를 감행했고 이러한 돌격을 상대편 보병 대형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반복했습니다.

기사
경기용 랜스(lance)로 무장하고 토너먼트 시연중인 리인앤터(reenactor)들


중세시대 가난한 농민병이나 용병들이 대다수였던 보병들은 경우 웬만큼 담대하고 많은 경험이 있지 않은 이상 수십 ~ 수백 명의 기사들이 감행하는 일제 돌격 두 세번이면 대열이 와해되어 버렸고, 이때부터는 칼을 뽑아 든 기사들의 일방적인 학살로 전투가 마무리되는 식이었습니다.  (여담으로 일정한 영지 없이 토너먼트가 열리는 대회장을 떠돌아다니며 상금으로 연명하던 무사들을 일컫는 말이 바로 프리랜서였습니다. 랜서(Lancer)란,  기병창(Lance)으로 무장한 기병을 의미하는 말이죠)

랜스
중세에 널리 사용되던 일반적인 형태의 랜스

 

중장기병의 몰락

 

중무장한 기병 중심의 이러한 전투양상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상대적으로 보병들의 훈련도, 무장, 사기가 낮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유럽의 기사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기병을 운용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은 모두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잔 전술로 유명한 몽고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히 몽고기병하면 일반적으로 가죽갑옷을 입고 마상궁술로 적을 제압하는 장면이 떠오르지만 몽고군에도 당연히 충격기병 역할을 하는 중장기병이 존재했습니다. 

 

파르티잔 전술이든 카우치드 랜스든 일단 적의 진형을 어느정도 와해시키고 나면 중장기병을 투입하여 전투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중세시대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행해지던 전투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상대적으로 양질의 갑옷이 널리 보급되고, 보병들의 훈련도도 높아지면서 기병의 전성시대도 슬슬 막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15세기 중반,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미늘창으로 무장한 스위스 보병대가 원형방진대형으로 중장기병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가 의 군대를 격파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잘 훈련된 보병대로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아퀘부스(arquebus)'로 일컬어지던 초보적인 수준의 화승총이 전장에 등장하면서 전투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됩니다.

화승총
15세기경 아퀘부스로 무장한 유럽보병 삽화

 

15세기경부터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화승총의 장점과 단점은 너무나 명확했는데, 장점으로는 기존의 원거리 공격을 담당하던 궁수들보다 훈련기간이 대폭 줄어들었으며, 곡사로 사격하던 활에 비해 직접 조준하여 직사로 적을 사격함에 따라 명중률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점 등이 있었습니다. 중세시대 숙련된 궁수 한 명을 양성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여가 소요됐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길어야 며칠이면 조작법을 익혀 한방에 기사를 쓰러트릴 수 있는 화승총의 메리트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반면 단점으로는 총의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는 것,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 결정적으로 장전에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실시간으로 급변하는 전장환경 속에서 분당 1발 수준의 발사속도는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총의 가격이야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고, 비가 오거나 하면 기병돌격도 마찬가지로 어려워지니 그것도 감내할만했지만 시속 5~60km로 내달리는 기병들을 상대해야 하는 화승총병의 입장에서 초탄이 빗나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2~3미터 길이의 장창(Pike)으로 무장한 창병들이 배치되어 화승총병들이 재장전 하는 동안 대열의 앞으로 나서 

기병돌격으로부터 화승총병들을 보호했습니다. 이러한 대기병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대형을 갖춘 보병대에 중장기병이 정면 돌격하는 기존의 전술은 더이상 먹히지 않았습니다.  

테르시오 방진대형에 카라콜 공격을 가하는 기병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장기병은 점차 전장에서 도태되고, 권총을 장비한 기병대가 보병대의 코앞까지 달려가서 순차적으로 권총 사격을 퍼붓고 퇴각하는 이른바 카라콜(Caracole)전술이 도입되게 됩니다. 이는 더이상 기병의 충격력으로 적의 보병을 상대할 수 없게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기존 아퀘부스 보다 훨씬 가볍고 파괴력이 강한 머스킷 소총과 머스킷 소총에 부착할 수 있는 고리형 총검(bayonet)의 발명으로 인해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카라콜 전술 조차 먹히지 않게 됐습니다. 머스킷 소총에 총검을 장착하게 되면서 파이크병은 필요 없어지게 됐고 그 빈자리를 머스킷 총병이 채우게 되면서 보병진형의 화력은 더욱 강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장의 주역은 다시 보병이 되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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