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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미드웨이는 미국의 승리가 아니라 일본의 패착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잘못 알려진 10가지 역사 논쟁 (8편) 上

by 미사리 건더기 2025.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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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은 미국이 압도적으로 이긴 전투일까? 일본의 전략적 오판, 연합함대와 태스크포스의 구조 차이, 그리고 실제 승패의 본질을 파헤친다."

 
 8. 미드웨이 해전은 미국이 압도적으로 일본을 이긴 전투다? 

 

7편을 올린 지 거의 9개월 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그동안 회사일이 너무 바빠 (는 훼이크고 타르코프 폐인생활 하느라 바빳음) 업로드를 못했습니다. 각설하고 오늘 글의 주제는 바로 스탈린그라드전투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투이자 태평양전쟁의 향배를 바꾼 미드웨이 해전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을 얘기하기에 앞서 왜 일본이 잠자던 미국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는지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따위는 없고 그냥 능력은 없는데 욕심만 그득그득 이 팩트)는 무엇인지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페리제독과 일본의 개항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끄는 태평양함대가 일본열도에 모습을 드러낸 1853년 이른바 '구로후네 사건' 이후 강제 개항을 해야 했던 처지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개항한 지 불과 30여 년 만에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흑선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을 불러온 구로후네(黑船) 사건


이후 30여 년에 걸친 시간 동안 혼란했던 조선을 구워삶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 하는 데 성공합니다. 물론 저 시간 동안 순탄히 조선을 집어삼킨 건 아니었죠. 그 와중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큰 이벤트가 있었으며, 특히 러일전쟁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승리였으나 실상은 피로스의 승리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2년 동안 국가 예산의 50% 이상을 국방비에 쏟아부어가며 얻은 대가는 고작 배상금 0원과 이미 러시아에게는 가치가 없어진 조선에 대한 배타적  영향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수준이었습니다. 

쿠데타
일본 군국주의의 시작을 알린 2.26 쿠데타

 

예견되었던 전쟁인 태평양전쟁

 

결국 일본국민들은 무능한 정치인들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한 불만이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1905년 히비야 소요가 발생하여 일본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후 일본 정부는 황국신민사상, 국민정신 총동원령 등을 통해 보수, 우경화를 조장해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일반 국민들이 군부에 대한 지지를 보내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른바 황도파로 불리던 일본 군부의 일부 급진파들은 군대의 개혁과 천황제 중심의 이른바 쇼와유신을 주장하며  2.26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쿠데타는 곧 진압됐지만 황도파와 대척관계에 있던 통제파가 군부의 실권을 거머쥐게 되면서 견제세력이 없어진 통제파 중심의 군부는 더욱더 비대해졌고 일본이 급속도로 군국주의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업은 전시경제 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평화란 곧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본 경제는 침략전쟁과 이를 뒷받침하는 군수산업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지탱되고 있었고, 이 중 하나의 바퀴만 빠진다고 해도 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상황에 있던 일본은 그 돌파구를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고 쓰고 대동아수탈권이라고 읽음)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침략전쟁에서 찾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가졌던 만주사변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주사변
중국의 심장부로 향하는 관문인 산해관을 점령한 일본군

 

 

이러한 상황에서 군수물자, 특히 석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는 이른바 남방계획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고 여기에 제동을 걸었던 게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 열강의 후발주자로서 필리핀에 알 박기를 시전하고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차에 지들보다 한발 더 늦게 온 일본이 달가워 보일리가 없었죠. 결국 미국은 일본에게 최후통첩을 시전 합니다.


'당장 남방계획을 포기하고 중국대륙 점령지를 모두 반환해라 안 그러면 너한테 석유 안 판다 ㅇㅋ?'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석유는 전쟁뿐 아니라 산업을 위해 필수적인 전략물자였고 땅 파봐야 용암이나 나오고 바다에서는 가다랑어나 나오던 일본은 말 그대로 외통수에 걸리고 맙니다.

석유를 포기하자니 전쟁을 못하겠고 전쟁을 안 하자니 애써 얻은 열강지위를 반납하고 다시 고만고만한 아시아의 변두리 국가로 떨어질게 뻔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생긴 일본은 마침내 전쟁경제를 과감히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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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엔 철이 덜 들었던 관계로 ‘내가 맛깔나게 미국의 싸닥션을 한대 후려치면 나한테 반해서 사귀자고 하겠지?’라는 삼류 막장 드라마스러운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네가 처음이야
나한테 이렇게 대한건 네가 처음이야........

 

그리고 마침내 1941년 12월 7일, 보무도 당당하게 연합함대를 앞세워 미국의 싸닥션을 거하게 후려치게 되니 이것이 바로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연 진주만 기습되시겠습니다.

진주만 공습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습 성공사례로 일컬어지는 진주만 공습

 

 

진주만 기습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함대는 주력 전함 8척 모두가 좌초 또는 침몰하고 3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피해를 겪게 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마침 훈련 등을 이유로 진주만에서 멀리 나가있던 항공모함 3척(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사라토가)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진주만 기습으로 한숨을 돌린 일본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전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해 불과 반년여 만에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일본제국
1942년 여름 일본제국의 최대판도

 

 

그리고 다시 한번 싸닥션 

 

하지만 어마어마한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 항공모함에는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이 사귀자고도 안하고)

미국의 발 빠른 대응 덕에 태평양함대의 전력이 서서히 복구되어 가자 일본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원이나 공업생산량이나 모든 면에서 미국에 열세였던 일본에게 있어서 시간은 결코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미국 최초의 반격이었던 둘리틀 공습

 

 

거기에 이른바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은 이러한 일본의 조바심에 불을 붙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일본제국 대본영은 마침내 미국의 태평양 함대 잔존세력을 깊숙이 유인해 단 한 번의 결전으로 태평양 함대를 격멸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태평양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미드웨이 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이를 저지하러 나타나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맛깔나기 그지없을 두 번째 싸닥션을 준비해 보기로 합니다.

 

한편 미국도 역시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사전에 일본군의 무전을 감청하고 낚시를 통해 일본군의 공격지점을 사전에 파악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아무튼 1942년 5월 27일, 진주만 기습의 주역인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항공모함 중심의 제1기동함대가 먼저 미드웨이를 향해 닻을 올렸고 이어 연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이끄는 전함 중심의 연합함대 본대도 곧 뒤를 따라 출항합니다.

야마모토이소로쿠
일본제국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당시 일본군의 작전개요는 대강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제2기동함대를 주축으로 하는 알류산 공격대가 알류산 열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의 주의를 끈다. 

 2. 제1기동함대는 미드웨이 섬에 대한 일제 폭격을 개시해서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상륙부대의 작전을 돕는다. 

 3. 미국 태평양 함대가 반격을 해올 시 제1기동함대는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을 조기에 포착하여 타격을 입힌다. 

 4. 이어 후속하는 연합함대 주력이 함대결전을 통해 잔존 태평양함대 전력을 격멸한다. 

 

이에 맞서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주력은 스프루언스 제독이 이끄는 TF(Task Force)16과 플레처 제독이 이끄는 TF(Task Force)17 2개 함대였고 이 두 개 함대 역시 항모 중심의 기동부대였습니다.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W. 니미츠

 

 

 

연합함대는 뭐고 TF는 또 뭐냐

 

여기서 잠깐, 도대체 연합함대는 뭐고 TF는 뭐고 이름 왜 그따구냐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잠시 부연설명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일본해군은 전통적으로 수직적이고 중앙집권적 지휘구조를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지휘체계의 뿌리는 과거 청일 전쟁당시까지 올라가는데 당시 황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토 스게유키 제독이 제1함대와 제2함대를 엮어 연합함대라고 명명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청일전쟁 종전 이후 해체된 연합함대는 러일전쟁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다시 부활시키게 되는데 역시 러일전쟁이 끝난 뒤 다시 해체됩니다. 

 

그리고 40년 여가 지난 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함대결전 사상에 물들어 있던 일본 해군은 다시금 연합함대 개념을  부활시켜 전력집중을 통한 단기결전에서의 승리를 꾀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모든 함대는 연합함대에 배속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개별 함대는 전함끼리 묶인 전함대, 순양함끼리 묶인 순양함대 등으로 편제되어 개별 함대는 독립된 함대라기보다는 연합함대의 지휘를 받는 전대로써 기능했습니다. 따라서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은 경우 개별 함대가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함대는 말이 연합함대지 실질적으로는 일본 해군 그 자체나 다름없는 상설조직이 되었습니다.

 

반면 미국의 경우 함대는 상설조직이 아닌 Task Force를 주력으로 운용했고, 임무 목적에 따라 Task Force는 수시로 편제가 바뀌었으며 임무 및 전황에 따른 함대 간 함정배속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Task Force의 지휘관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환경에 맞춰 유연한 전략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고전적인 함대결전 사상을 베이스로 하는 연합함대는 전함 중심의 편제를 중시했고 항공모함은 전함의 보조역할을 수행하는 함정으로 취급한데 비해, 항공모함 중심으로 편성된 미국의 TF는 고정편제보다는 단위임무에 최적화된 구성으로 그때그때마다 유연하게 편제를 구성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켜 왔는지는 다음 편에서 계속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량조절에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엔터프라이즈
미드웨이 해전에서 치열한 대공탄막을 뿌리며 분전중인 미국 TF16 소속 항모 엔터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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