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 조선군 8만이 일본군 1,600명에게 무참히 패배한 용인전투. 제승방략 체제, 문관 중심 지휘, 사기 저하 등 총체적 국방붕괴를 보여준 한국 3대 패전 중 하나를 되짚어봅니다."
이번에는 한국 3대 패전사를 소개해보는 시간입니다.
항상 한산도 대첩, 살수 대첩 이런 거만 익숙하다 보니 의외로 한국(조선)도 말아먹은 전투가 적지 않은걸
모르시는 분들이 꽤 계시는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도 말아먹은 전투가 꽤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발려버린 전투, 흔히 한국 3대 패전이라고
불리는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타임라인을 따라서 제일 오래된 전투부터 끄집어 내보겠습니다. 바로 임진왜란 당시 벌어진 용인전투인데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군 8만(추산)이 일본군 1,600명한테 개 쳐 발린 전투입니다.
오타 아닙니다. 16,000명 아니고 1,600명 맞습니다. 그럼 썰 풀어보겠습니다.
시대배경과 제승방략 제도의 문제점
아시다시피 1592년 4월 1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하에 왜군 20만 명이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제승방략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냐면 쉽게 말해서 예비군 동대 같은 개념입니다.
평소엔 밭 일하다가 난리 터지면 면사무소 가서 창 한 자루 받고 전투에 투입됐다는 얘기죠.
지금이랑 별차이 없는 거 아니냐고요? 차이 있습니다. 운영방식이 예비군 동대라는 거지 엄연한 현역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월급 받는 전문 부대가 있었지만 이건 다 갑사니 중앙군이니 하는 일부 부대였고, 한양을
제외한 대부분의지역은 이런 식으로 운영됐습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지금처럼 뭐 장갑차나 차가 있던
시기도 아니고 뭔 일 터지면 창 들고 뜀박질해야 하는데 조선 중기 안방 드나들듯 동네 왔다 갔다 하는
왜구들이 히트앤런의 달인이었기 때문에 일부 거점에 대군 주둔시켜 놨다가 난리 터진담에 보내봐야
이미 왜구들은 다 털어먹고 본진으로 튀고 난 뒤였으니까요
어차피 대부분의 경우 쳐들어오는 왜구의 숫자도 수십에서 수백 명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차라리 쳐들어올 때마다 바로바로 수백~수천 명 장정 끌어모아 싸우는 게 빨랐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신속대응군이나 뭐 기동타격대 같은 개념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근데 이게 단점이 몇 개 있었는데
그 단점들이 사소한 게 아니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1. 병력집중 불가
이게 왜구가 쌀 몇 가마니 털러 오는 거 때려잡는 수준이면 아주 훌륭한 전술이었는데 도요토미가
20만이라는 대군을 보내면서 얘기가 달라집니다. 100년 동안의 내전으로 닳고 닳은 20만 대군
이 새까맣게 몰려오는데 평소에 밭 갈고 논일하던 장정 수백 명이 창 한 자루씩 들고 진 치고 있어
봐야 불난 집에 불 끈답시고 물 한 바가지 뿌리는 거랑 다를 바가 없죠.
애초에 이런 식으로 동네마다 수백 명씩 모여 있어 봐야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결전'을
치를 대군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2. 인프라 붕괴위험
거기다가 전투가 한번 끝나고 나면 그 지역의 기반이 뿌리째 뽑히는 타격을 입는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당시 장정 1명이 전사하는 것은 단순히 현대 시대의 병사 1명이 전사한다는 개념이 아닌 농업생산력을
국력의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생산력이 직접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지금과는 달리 지역 간 이동이 많지 않은 시대였기에, 특정 지역의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결과적으로
해당 지역의 경제적 기반 자체가 박살 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제1차 대전시기에 영국은
사기유지를 목적으로 출신 동네별로 보병대대를 편성했다가 참호전 닥돌로 인해 대대 단위로 병력이
증발(?)하는 일이 빈발하면서 해당 지역의기반이 송두리째 작살나는 걸 직접보고 부랴부랴
이 제도를 폐지한 일이 있습니다.
3. 지휘체계 및 전문성 결여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경우 관료와 전문군인이라는 뚜렷한 개념차이가 부재했던 관계로
(북방군 및 수군제외) 지방의 행정관료가 해당 지역의 치안이나 안보도 겸사겸사 같이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문신(문과가 또) 출신이었기에 군사적 지식과 경험이 전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똑같은 농민출신이라지만 전쟁에도 이골이 나있던 왜군 병사들에 비해 수백 년간
큰 전란 없이 농사짓고 살던 평범한 조선 장정들이 대규모 군사작전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도가 있을리 만무 했죠.
결국 건국 이후 수백년간 이렇다 할 대규모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조선의 입장에서 갑툭튀 한
수십만의 왜군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그렇게 지리멸렬했던
이유는 바로 이렇게 국방전략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투배경
어쨌거나 왜군들은 부산에 발을 내딛고 나서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한양까지 하이패스로 쾌속진군을 계속했습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저항다운 저항을 한건 신립 장군이 이끌던 5천 기병대였습니다만
그 5천 기병대도 북방에서 여진족이랑 머리채 잡고 드잡이 하던 정예 병력이 아닌 급조한 기병대였던 관계로
조선의 국운을 걸기에는 다소 무리수가 있는 전력이었습니다.
숙련도도 쪽수도 뭐 하나 비빌 수 있는 구석이 없던 5천 기병대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렇다 할 유효타 없이
탄금대에서 전멸해 버립니다.
그렇게 조선은 꿈도 희망도 없는 내일을 준비해야 했고 (feat. 선조) 선조는 부랴부랴 의주로 빤스런을
시전 한걸로도 모자라 명나라에 망명 신청을 했다가 비자 발급이 안되어 만력제에게 대차게 까이고 유턴합니다.

아무튼 단 3주 만에 한양까지 탈탈 털어버린 도요토미는 조선은 이대로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조선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박박 긁어모은 8만이라는 대군이
용인에 집결합니다. 8만 대군은 기세등등하게 용인 (정확히는 지금 광교산 일대)에 진을 치고
한양 탈환을 위한 가열찬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8만 명이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 오합지졸들이었다는 거였습니다. 무장은 당연하게도
창 활이었고 심지어 농기구 들고 온 사람도 있었을 정도니 체계적인 작전이나
전술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지휘관들이 그런 역량이 있었냐도 문제)
한술 더 떠 지휘관들도 그냥 자기 휘하에 있는 병력들 긁어모아 달려온 까닭에 뭐 요새말로 치면
전투서열이나 지휘권 확립도 안된 상태였죠. 사실상 말이 근왕병이지 그냥 창든 군중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습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수적 우위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공격하자,
아니다 산성에 짱 박혀서 농성하자 등등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안 그래도 사기라 할 것도
없던 8만 군중(?)은 더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전투경과
이러고 있는 와중에 마침 왜군이 소규모 방책을 세운 것이 관측됩니다. 명목상 최고 지휘관이었던
이광은 왜군병력도 얼마 안 돼 보이고 하니 사기도 올릴 겸 방책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왜군들은 수적 열세에 기가 꺾여 보였고 조선군은 기세등등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물러난 왜군은 와키자카가 이끄는 주력에게 SOS를 쳤고 왜군 본대는 조선군이
오합지졸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매복 기습을 시도하게 되죠.

이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조선군은 이광의 지시로 1,000명의 선봉대로 다시 공격을 개시합니다.
조선군 주력이 산길에 다 달았을 무렵 산기슭 반대편에서 무수한 조총소리와 함께 일본군이 뛰쳐나와
측면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난데없는 왜군의 기습에 훈련도 안되어있었던 데가 실전경험도 없던 오합지졸인
조선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하며 패주가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선봉대가 무너지는 걸 본 조선군은 작전을 바꿔 왜군 주력이 주둔 중이었던
문소산을 포위하고 진을 칩니다. 안 그래도 사기가 낮던 조선군은 선봉대의 패주를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위태위태한 상태로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튿날 아침.
계곡에 자욱한 안개가 끼었고 규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조선군이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침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안개를 뚫고 왜군들이 돌격해 왔습니다.
왜군들의 함성과 조총의 발포음이 온산을 가득 메우자 안 그래도 낮은 사기로 간신히 진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군은 봇물이 터지듯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장에서의 공포는 전염병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퍼지기 마련입니다.
사방에 서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와 함성 속에서 겁에 질린 조선군중 누군가가 "우리가 졌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자 8만에 달하던 대 병력은 지휘관, 병사를 할 것 없이 일제히 도주를 시작합니다.
80,000 vs 1,600 의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권율, 황진을 비롯한 몇몇 장수들은 전투 전에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깨닫고
병력을 온전히 유지한 채 철수했습니다. 특히 권율의 경우 이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는데
덕분에 임진왜란의 중대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결과
당시 왜군 장수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취한 조선군의 수급은
약 1,000개였다고 전해지는데아무래도 수적 열세에 있던 왜군인 데다가 기본적으로 수군들이었던 탓에
기병 전력도 모자란관계로 전과 확대에는 실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흩어진 8만 병력 대부분은 의병에 합류하거나다시 관군에 복귀해 왜군과 싸우게 되지만,
이건 훗날의 이야기고 어쨌든 용인전투의 졸전으로 인해 한양 조기 탈환 시도는 물거품으로 끝나고
이후 왜군은 평안도 함경도 까지 안방 드나들듯 휘젓고 다니는 참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용인 전투는 단순히 한 차례의 패전이 아니라 조선군 국방체제의 총체적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제승방략 체제, 문관 중심의 지휘, 정예 병력의 부재, 그리고 농업생산력 기반의 병력 운용 구조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이지요. 즉 당시 조선군은 숫자만 많았을 뿐 실질적 전투력이 없는
오합지졸 집단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과 명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조선이 어찌 되었을지 암울해지는 대목입니다.
결국 용인 전투는 '승병승선 이후구전' (이긴 군대는 싸우기 전에 이미 이겨놓고, 진 군대는 싸우면서
이길 방법을 찾는다)이라는 손자병법의 대원칙이 여실히 드러났던 전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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