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실각과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처절한 패배를 겪는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쌍령 전투, 삼전도의 굴욕까지 이어진 참사의 흐름을 짚어봅니다. 현실 도피가 부른 국가적 재앙의 기록."
인조반정과 후금의 등장
때는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좌에 앉은 인조는 광해군처럼 명-후금간
위태위태한 줄타기 외교를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진족들이 일으킨 후금은 오랑캐라며 무시하고
명나라에게는 깍듯하게 사대를 지속했었죠.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은 후금은 대대적인 명나라 정벌에 앞서 후방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것이 1627년 1월 발생한 정묘호란입니다. 당시 후금은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략해서 눌러앉을 여유도 이유도 없었던 만큼 경고차원에서 형제맹약만 맺고 철수합니다.
당연하게도 문명국이었던 조선이 형.............................일리는 없었고 동생이 됐습니다.

조선건국 시부터 주야장천 딱빰 때려가며 어르고 달래던 여진족이었던 만큼 조선입장에서는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죠. 그럼 상식적으로 이때라도 노선을 명확히 해야 했습니다.
조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죠.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충실히 사대를 지속하면서 망해가는
명과 운명을 같이할지 아니면 더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청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지 말이죠

그리고 1번을 택하겠다면 당연히 후금의 재침공이 예상되는 만큼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에서 고작 1년 빠진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대로 준비한 건
없다시피 했습니다. 수준 높은 형이상학적 담론이 오고 갔던 당대 붕당정치의 순기능이
있었다고는 하나 주기론이 맞든 주리론이 맞든 홍타이지와 성리학 랩배틀 떠서 승부를 지을게
아니라면 위태위태한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하등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계획 없던 남한산성행
물론 조선도 나름대로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만주벌판의 다크호스로 떠오르던 후금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36년 12월, 국호를 청으로 고친 홍타이지가 직접
이끄는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물밀듯 쳐들어 옵니다.
조선은 늘 하던 대로 거점방어를 선택했으나 기병중심의 청군 선발대는 거점을 우회해 한양으로
하이패스 진격을 해버립니다. 당시 진군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불과 3일 만에 강화도로 몽진을 결정하지만 이미 정묘호란 때 이런 뻔한 대응을 경험한
청군은 이미 개성과 강화도 앞까지 선발대를 보내 길목을 차단합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그나마 가까운
남한산성에 짱 박혀 농성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근왕군의 도착과 전투경과
그리고 임금을 구하기 위해 조선팔도에서 근왕군을 모집하라는 격서를 돌립니다. (늘 그렇듯 사고는
지들이 치고 수습은 애꿎은 백성들이....) 어쨌거나 저쨌거나 킹은 킹이었기에 일단 근왕군이 주섬주섬
모이긴 모입니다.
정확한 숫자는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당시 조선의 군수보급능력 및 전장상황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대략 1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전해집니다. 근왕군은 경상좌병사 허완이 이끄는 좌군,
경상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우군 2개 부대로 나뉘어 쌍령 (지금의 광주)에 집결했는데 기병위주인
청나라 군은 일단 위력정찰 겸 선발대 수천을 보내 좌군을 치게 합니다.
문제는 이 위력정찰에 좌군이 무너지게 됐다는 점입니다. (..........) 당시 조선군이 무장했던 조총은
분당 사격속도가 1~2발에 불과했는데, 사수가 재장전 시 무방비 상태가 되므로 적의 근접 전을 견제
하기 위해 창병과 총병의 유기적인 협동전술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또 사거리와 명중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일사불란한 일제사격술이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까지 갈 것도 없고 정묘호란을 거치면서도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조선군은 청의 기병대를 보자마자 마구잡이로 조총을 난사했고
창병들은 제대로 엄호도 못하고 진이 그대로 무너져 내립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좌군을 지휘하던
허완마저 전사하자 좌군은 이렇다 할 교전도 못해보고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됩니다.

좌군을 무너뜨린 청군 기병대는 여세를 몰아 우군을 향해 쇄도했는데 좌군이나 우군이나 오합지졸인 건
별반차이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우군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조총을 난사하여 탄약을 낭비하는 것을 막겠답시고 1인당 10발 내외의 탄환과 화약을 지급했는데
문제는 지근거리에서 청나라 기병대가 헤집고 다니는 통에 우왕좌왕하며 순식간에 10발을 다 쐈다는 점입니다.
탄이 다 떨어진 병사들은 앞다투어 군관들에게 몰려가 화약과 탄환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원인불명의
불씨가 화약더미에 옮겨 붙어 대폭발이 일어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 순식간에 발생한 폭발로
상당수의 조선군이 즉사하고 갈팡질팡 하던 차에 청나라 기병대가 우군 진영으로 들이닥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조선군 우군은 후방에서부터 전열을 이탈해 도주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순식간에
진이 무너져 내리면서 좌군 우군은 모두 패주 하게 됩니다. 이 혼전의 와중에 민영까지 전사하고
조선군 지휘관 2명이 모두 전사한 상황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과 결론
결국 남한산성에 짱 박혀 애타게 근왕군을 기다리던 인조와 조정중신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45일간의
농성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gg를 치게 됩니다.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삼전도 (지금의 잠실)까지
말도 못 타고 걸어가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머리를 찧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청나라와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의 맹약을 맺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 준비 없는 만용을 국가단위로 부리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는지 여실하게 보여준 케이스가
바로 병자호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과의 의리를 선택했으면 그에 걸맞은 군사·군수 준비가 필요했고
현실 수용을 택했으면 현명한 외교전략이 필요했습니다. 둘 다 놓친 대가는 쌍령의 참패와 삼전도의 굴욕이었습니다.
명분과 현실 중 무엇을 택하든, 준비 없는 선택은 패배라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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