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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5편

by 미사리 건더기 202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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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4편 보러 가기

2024.11.27 - [밀리터리 잡설]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4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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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련은 단순히 인해전술로 독일을 밀어붙였나?

 

독소전쟁 초기 독일의 화려한 전과, 그리고 연합국의 언론플레이로 인해 종전 80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에도 소련이 단순히 인해전술로 독일을 밀어붙였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배경 영화 중 고증은 엉망이지만 나름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병사 2인당 소총 1정 지급이라는 사상 초유의 막장 행보를 보이며 무의마한 자살 돌격을 감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너미앳더게이트
병사2인당 소총1정 지급이라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 에너미엣더게이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고증오류덕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련군은 단순히 인해전술로 독일을 이긴 것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럼 과연 일반적인 상식(?)처럼 독일군은 늘 소수정예로 잘 싸웠고 소련군은 단지 물량으로 밀어붙였던 게 승전의 요인이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물론 앞서 (4편) 말한 것처럼 무능한 스탈린의 지휘와 열악한 통신체계 그리고 구식전술의 콜라보로 시너지효과를 일으킨 독소전 초반에는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교환비가 무려 1:2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정신 차린 스탈린이 지휘 일선에서 물러나고 유능한 야전 지휘관들에게 그 권한을 넘겨주면서부터 전투교환비의 격차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독소전의 대명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소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게 된 결정적인 전투인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는 일방적으로 소련을 밀어붙이던 독일군이 개전 6개월 만에 공세종말점에 봉착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이벤트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작전중인 소련군

 

손자병법에 '승병선승 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이기는 군대는 전투이전에 이미 이긴 상태에서 싸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싸움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정 피할 수 없을 경우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라는 손자병법의 대원칙을 함축적으로 대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통치기간 중 유럽대륙 전체를 적으로 둔 덕에 늘 열세의 전력으로 싸워야만 했습니다. 단, 이는 전체 전력이 그랬다는 것이고 개별 전투에서는 당연하게도 적보다 숫적우위를 달성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는 꼭 필요한 순간에 전략적인 부대배치를 통해 전장에서의 숫적 우세를 달성하게 했던 나폴레옹의 능력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소련군에 비해 늘 독일군이 소수정예로 싸웠다는 말은 지피지기 하지 못한 히틀러가 무능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한대의 기갑차량, 한대의 수송차량이 아쉬운 상황에서 바바로사 작전 개시일을 늦춰가면서 까지 무리하게 북아프리카전선을 확장했을뿐더러 1942년 춘계공세 때 소련의 심장이었던 모스크바 점령에 집중하는 대신 남부집단군을 주력으로 카프카스 지대를 공략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고 하기엔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교환비의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독일군의 전략적 반격능력이 완전히 소멸하게 된 계기였던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종전 시까지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교환비는 1:1.1 수준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소련군은 정교한 제병합동작전을 통한 종심돌파, 고속기동 전 등을 선보이며 소련군이 1941년의 군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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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패망의 쐐기를 박은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

 

공격자는 최소한 방어자의 3배 이상의 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식이며, 방어자는 그만큼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쿠르스크 전투 이후 줄곧 방어전을 펼쳤던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교환비가 1:1.1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소련군이 단순히 인해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였다는 일반적인 통념과도 배치되는 결과입니다. 

 

1942년 스탈린이 채워놓았던 족쇄가 풀리자 주코프, 추이코프, 로콥프스키 등 소련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은 앞다투어 전공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들은 전쟁이전 억울하게 숙청당했던 천재전략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종심작전 이론을 충실히 실전에 접목시켜 독일군을 분쇄해 나갔습니다.

 

물론 이러한 전과의 배경에는 미국이 랜드리스를 통해 막대한 양의 자원 및 트럭, 지프 등 전력상에 포함되지 않은 수십만 대 단위의 비전투 차량을 지원했기 때문인 점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비전투 차량 및 자원들을 거의 무제한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소련은 각종 기갑차량 등 군수물자 생산에 올인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전투현장에서 독일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전개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을 앞서는 공업 생산량 및 인적 자원을 보유한 덕택에 미국의 도움이 없더라도 독일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결과였으나 어쨌든 이러한 미국의 지원덕에 전쟁에서 소련의 피해가 줄어들었고 전쟁을 하루라도 일찍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제국의사당
제국의사당 옥상에 적기를 게양하는 소련군 병사

 

 

하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과 이로 인해 늘 열세에서 싸워야 했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이후 줄곧 방어전만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교환비가 1:1에 근접할 정도로 격차가 좁혀졌다는 점에서 전투력에서 독일군이 소련보다 높았고 소련군은 무식하게 인해전술로 밀어붙인 것이라는 논리 자체가 모순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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