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일본 치하 전차의 실체: 왜 종이전차였는가

by 미사리 건더기 2025. 11. 19.
반응형

"이 글은 일본군 치하 전차가 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이전차’라는 조롱을 들었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공업력·예산·군사교리 측면에서 분석합니다. 중국전선에서의 착시된 승리, 할힌골 전투에서의 충격적인 패배, 태평양전쟁에서의 절망적 전력차를 다루며, 일본이 애초에 총력전을 수행할 국력과 산업기반이 부족했다는 근본적 문제까지 짚습니다. 치하 전차의 등장부터 몰락까지를 통해 일본 전쟁 수행 능력의 실체를 보여주는 역사 분석 글입니다."

 

1. 치하의 절망적인 스펙과 실전

 

오늘은 종이 비행기 제로센에 이어 종이 전차라는 악명으로 자자한 제2차 세계대전당시 일본군의 중형전차 치하(Chi-Ha)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치하는 1938년에 실전배치된 일본군의 중형전차로 고작 14t급의 무게 (참고로 이 시대 전차의 무게는 장갑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전차의 중량만 봐도 대략적인 방어력 추정이 가능합니다.)에 중형전차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전차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기준으로도 이미 전차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한 스펙을 갖고 있었으니, 주포는 57미리 산포, 정면장갑 25mm 측면장갑은 10mm였던 장갑차 수준의 전차였습니다. 

치하
위풍당당한 치하땅

 

이 수치는 당시 연합군이 보유한 어떠한 종류의 대전차포는 물론 심지어 보병들이 쓰는 12.7mm 중기관총도 못 막을 수준이었으며, 당시 미군 보병들의 표준 제식 소총이었던 M1 garand(!)의 철갑탄 근거리 사격에도 관통이 됐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1938년 당시 일본의 주전장인 중국본토에서는 이 정도 전차로 꽤 훌륭한 전과를 낸 게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군이 상대했던 대상은 제대로 장비를 갖추기는커녕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지방군벌들의 민병대들이나 국민당군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혁혁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치하의 앞날에 짙은 그림자가 지워졌으니 바로 1940년 발생한 할힌골 전투였습니다. 소련과의 국경분쟁으로 시작됨이 전투는 일본에서는 애써 전투라며 축소하지만 사실상 규모만 놓고 보면 러일전쟁 시즌2에 버금가는 대규모 병력간의 회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중국대륙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의기양양한 상태였으나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지켜졌으니, 이미 1940년 붉은군대는 러일전쟁 당시의 러시아군이 아니었습니다.

대전차지뢰
셔먼 파괴용 자폭죽창

 

특히 소련의 기갑전력은 BT-7 등의 경전차 위주로 이뤄졌으나, 일본군은 BT-7조차 격파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은 것도 모자라 치하 위주로 구성된 기갑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워게임을 해도 질 것 같으면 억지로 일본군이 이기도록 조작(!) 하는 정신나간 조직이 당시 일본 군부였으니 패전의 전훈 따위 알게 뭔가요 그냥 우리가 운이 없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는 게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경전차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전차를 중형전차랍시고 수령한 전차병들만 파리목숨이나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주력전차였던 M4 셔먼전차가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에게 하도 호되게 당하던 시점이라 이른바 '론슨라이터'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게되는데 일본군은 M4 셔먼은 고사하고 M3 스튜어트 경전차를 상대로도 답이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최고의 기갑전력이 바로 필리핀 점령당시 노획한 미군의 M3 스튜어트 경전차였으니 말 다했죠. 

그리고 미국은 M3 스튜어트는 차치하고 일본군에게 중천차급 위력을 발휘하던 M4 셔먼만 해도 매달 1,200 ~ 1,400대를 찍어내고 있었습니다. 

 

일본도 이러한 전력차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후기형은 대전차포를 장착한 치하 개량형, 그리고 스튜어트와 비슷한 성능의 

치누카이 전차를 차례로 실전 배치 했으나 워낙 저열한 성능 및 압도적인 숫자의 열세로 인해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2. 치하가 주력 전차가 된 이유 

 

그럼 일본은 왜 이렇게 허접한 전차를 주력으로 운영했던 걸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습니다. 

먼저 해군과 육군의 예산차이가 어마어마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군비의 70%는 해군에게 할당되었는데 이는 태평양을 주 전선으로 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안 그래도 다른 열강에 비해 국력이 열세였던 일본에게 있어서 연합함대를 운영하고 신형함을 건조하기에도 예산이 빠듯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군입장에서 고품질 특수강을 생산해서 전차에 두른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습니다.

 

두 번째로 낙후된 공업기술 때문이었습니다. 야마토나 제로센등 유명한 병기덕에 당시 일본이 다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업기술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야마토나 제로센이나 자세히 뜯어보면 무슨 엄청나게 신묘한 기술이 들어간 게 아니라 구형설계 또는 극단적인 경량화라는 약점을 갖고 있는 무기체계였습니다. 

 

유럽열강들과 달리 정밀 공작기계가 없다시피 했기에 모든 공정은 소수의 장인이 직접 수작업으로 생산해야 했고 덕분에 개별 부품의 표준화는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종류의 소총까지도 부품 호환성이 낮았던 걸로도 유명한데 대전말기로 가면서 병력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급기야 무기를 제작해야 하는 숙련공까지 징집해서 총알받이로 굴렸던 터라 안 그래도 조악한 일본 무기의 품질은 더욱더 나락으로 가게 됩니다.  

대전차총검술
후세에 길이 남을 일본군의 대전차 총검술

 

세 번째로는 바로 전근대적인 육군의 교리 탓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부는 기갑 전이라는 개념자체가 아예 없었고 전차는

오로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거리에서 적의 벙커, 기관총 진지만 공격하면 됐기에

주포는 고폭탄을 쓰는 야포, 장갑은 20mm 수준의 종이껍데기를 씌워도 큰 문제가 없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대전차 무기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중국전선에서는 이러한 허접한 전차교리로도 큰 성과를 거두지만 

태평양전쟁이 본격적으로 지상전으로도 확대 되면서 일본 육군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 시작됩니다.

 

3. 결론

 

결국 일본은 애초에 기술력도, 자원도, 국력도 구미 열강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벌 수준의 중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하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져 탈아입구, 대동아공영권 같은 허울 좋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우리도 제국주의 열강이다'라는 집단최면과 광기에 물들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하 중형전차야 말로 당시 일본군의 총체적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치하
미얀마 전선ㄴ에서 파괴된 치하전차 개량형을 살펴보는 영국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