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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에솦 문학 (기관총 깎던 노인)

by 미사리 건더기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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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전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에솦을 알게 되어 화전필드 빠꾸미를 하고 있을 때다.

게임을 뛰다가 비비탄을 채우기 위해 일단 세이프티 존으로 가야 했다.

세이프티 존 앞에 옵스코어를쓴 노인이 한명 앉아 있었다. 요즘 분대지원화기가 핫 하다고 하길래 분대지원화기를 한정 사가려고 깍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기관총 한 정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게임 시간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팀장이 눈치를 주고 있었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충전을 할만큼 해야지 총이 나가지, 건전지가 재촉한다고 리튬 폴리머가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팀장이 야마 돌았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어차피 이번 게임은 뛰기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아이코스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바렐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기관총이다.

 

 

게임을 놓치고 다음판에 나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M110 DMR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낡은 옵스코어에 달린 마모된 레일을 보니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프리필드에 가서 탄속을 봐달라고 기관총을 내놨더니 사장님은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VFC제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사장님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바렐이 너무 무거우면 자빠지거나 무게중심이 안맞아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바렐이 너무 가벼우면 산악전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부러지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예전부터 잘만든 총은 6.03미리 정밀 이너바렐을 넣어줘서 집탄이 좀체로 튀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제 소총은 탄속이 한번 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비록 enc라 하여도 아레스 기박을 넣거나 타이탄을 넣고 기어간격 조정을 세번 한뒤에 비로소 기어박스를 결합 한다.

이것을 심세팅한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중국제는 보기에는 이쁘게 디자인을 뽑는다 그러나 총이 견고하질 못하다. 며칠씩 걸려가며 세팅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AR만 해도 그러하다. 예전에는 총을 사면 게임용은 얼마, 방구석용은 얼마, 콜렉팅용 얼마로 구별했고 격발만 해보고 보관한 것은 1.5배이상 비싸다. 미사용신품이란 디스플레이만 해둔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디스플레이만 해둔 총인지 파킨에 가서 몇백발을 쏜 총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디스플레이만 해둘리도 없고 또 그 말을 믿고 세배씩 값을 쳐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파는 그 순간만은 오직 좋은 물건을 팔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총을 튜닝하고 매물을 내놨다.

 

이 기관총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핫바에 콜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 게임때 화전필드에 도착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총포법 단속에 걸려 당분간 게임을 못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팀장이 만지작대는 DMR을 바라 보았다.

죽창마냥 기다란 바렐 끝으로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연기를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기관총을 깎다가 우연히 바렐 끝에 담배연기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도연명(陶淵明)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와이프가 총을 전부 바닥에 패대기 쳐놨다. 전에 눈치 보며 한자루 두자루총을 모으던 기억이 난다다. 기관총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기관총 연사질에 뉴비 비명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의성(萬戶擣衣聲) 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擣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년전 기관총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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